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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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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년
  •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어떻게 선정되나요?
  • 김대지 사진
    김대지 사진 1
  •  김대지 [1891~1942]
     훈격 : 독립장 / 서훈년도 : 1980년
    공적개요
    ㅇ 비밀결사 일합사 조직, 동화학원에서 민족 교육 실시
    ㅇ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교통차장, 내무위원
    ㅇ 곽재기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과 일제요인 처단 계획 참여
  • 공적개요
  • 포토갤러리
  • 공적개요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경남 밀양에서 비밀결사 일합사를 조직하고, 동화학원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등 요인으로 활동하면서 곽재기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과 일제요인 처단 등 의열단의 활동을 지원한 김대지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91년 경남 밀양군 밀양읍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선생은 부친의 엄격한 가르침 아래 한학을 익히고 선비로서의 절개와 지조를 배웠다. 1905년 밀양지역의 반일독립투사의 요람인 동화학원에서 수학 한 후 민족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밀양에 청년회관을 건립하여 비밀결사 조직의 터전을 마련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항일투쟁단체인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여 밀양지역의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전개방법을 모색하는 한편, 광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항일독립단체에 참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1910년대 후반부터 국내 항일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중국, 만주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전개하던 중 검거되기도 하였다. 출옥 후 고향인 밀양에서 비밀결사조직을 추진하다 여의치 않자 만주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전개되던 시기,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동기부터 임시정부 의정원의원과 국무위원을 겸임하여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데 헌신하였다. 한편 중국 동삼성, 북경, 길림, 상해를 왕래하면서 비밀결사조직의 구성원, 연락기지, 무기, 자금 등의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였고, 마침내 1919년 11월 의열단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선생은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을 계속하면서 의열단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등 민족독립을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 나갔다.

    이후 1926년 영고탑으로 옮겨 1929년까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통합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김동삼이 밀정에 의해 체포되고 김좌진 마저 피살되면서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한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선생은 항일독립운동 전기간을 통해 특정계파나 주의에 연연하지 않고 항상 균형 감각을 지니고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으며, 무력투쟁과 혁명을 통한 완전한 자주독립노선을 표방하면서 활동하였다.

    1942년, 선생은 이역만리 빈강성 파언현에서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51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선생은 국내외를 오가며 오직 우리 힘에 의한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평생을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투사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상세내용
  • 외로웠던 민족의 큰 봉우리, 일봉 김대지의 생애와 항일운동


    .


    i. 출생과 성장


    일봉(一峰) 김대지(金大池)는 제국주의 열강의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이 본격화되어 민족적 위기감이 팽배한 1891년 10월7일 경남 밀양군 밀양읍(慶南 密陽郡 密陽邑)에서 그 고을의 가난한 유생이었던 부친 김경수(金景守)와 모친 정라(丁羅)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호는 일봉이며, 독립운동시절에는 인식(仁埴), 정창(丁昌), 자동(子重) 등의 이명(異名)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본명은 대지(大池)인데 사료에 따라서는 大地, 大智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부모가 천한 이름을 지으면 장수한다는 말을 듣고「돼지」라는 음에다 큰 못이라는 뜻으로 「大池」라고 지었다고 한다.


    일봉은 동향의 부호인 박 노인의 이남삼녀 중 장녀인 박선이(朴仙伊)를 아내로 맞이하여 철수(哲秀), 정숙(貞淑), 철준(哲俊), 철중(哲中), 화숙(和淑), 철우(哲祐) 등 사남이녀를 낳았다. 그의 부인은 용모가 출중하고 예의범절에 밝아 향리의 여러 집안으로부터 청혼이 쇄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의 부친은 비록 부유하진 않았지만 학식 있고 몸가짐이 반듯한 일봉의 전도가 유망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를 사위로 맞이하였다. 박 노인은 일봉이 국내외로 넘나들면서 독립운동에 전념하여 가정을 돌보지 않아 그의 딸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결국에는 이역만리에서 젊은 나이로 운명하였는데도 사위를 원망하지 않으며 끝까지 경제적인 도움을 준 위인이었다.


    일봉은 부친의 엄격한 가르침 아래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다. 그의 부친은 아들에게 학문뿐만 아니라 유생의 절개와 지조도 가르쳤다. 이런 영향으로 일봉은 어려서부터 강직하고 의분심이 강한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집 주변의 서당에서 줄곧 한학에 전념하여 유학에 대한 식견을 갖추었고. 1905년 전홍표가 고향에 근대적 신식학교인 동화학원을 설립하자 이곳에 입학하여 1911년까지 수학한 후 모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당시 동화학원은 사립으로서 밀양지역의 반일독립투사를 배양하는 요람으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후일 의열단의 핵심인물이 된 황상규, 최수봉, 고인덕, 김상윤 등도 이 학원 출신들이다. 일봉은 동화학원에 입학하여 신식학문을 익히던 중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그 결과 조선은 일제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남달리 의분심이 강한 15세의 젊은이 일봉은 비분강개하여 동료들과 남천강 백사장에 뛰어가 청천을 향해 소리 높여 외쳐보기도 하고 땅을 치며 통곡도 했다. 울분과 비통에 잠겨 있는 그에게 큰 감명을 준 것은 《황성신문》에 게재된 장지연의「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이었다. 일봉은 몇 번이나 이 글을 정독하면서 가슴에는 뜨거운 피가 솟아오름을 느꼈을 것 이다. 전국각지의 상소항쟁, 순국열사의 속출, 침략주모자의 저격사건 등의 소식을 계속 접하면서 일봉은 조국의 국권회복에 신명을 받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동화학원을 졸업한 후 상경하여 신문물, 신학문을 익히기 위해 영어와 일본어 공부에도 주력하였다. 그리고는 밀양에 청년 회관을 건립하여 청년들의 가슴에 애국심을 불어넣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이바지할 결사조직의 준비 장소로 활용하였다. 지금도 이 청년회관의 잔해가 밀양읍 내이동에 남아있다.


    ii. 항일독립운동의 전개


    김대지가 그의 고향인 밀양에서 동화학원을 졸업하고 본격적인 항일독립운동의 대열에 뛰어든 것은 「일합사」라는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한 이후부터이다. 일합사는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망국의 비애를 통감하고 국권회복에 청춘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품은 20세 전후의 밀양지방 청년들이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외견상 친목단체로 위장하고 있으나 실은 조국독립을 위해 청춘을 바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방한 항일투쟁단체였으며, 핵심인물은 김대지를 비롯한 안곽, 이각, 이영재, 명도석, 황상규, 윤치형 등이다. 이후 이들은 밀양청년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이후 풍기에서 광복단이 결성되자 동지들과 함께 광복회에 가입하였다. 일봉은 1914년 광복단의 동지들과 군자금 모금을 위해 충청남도 천안군 직산면 삼곡리 연안에 소재한 직산사금광을 찾아갔다. 그는 이곳에서 노동자로 취업하여 동료들을 설득하여 군자금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저임금에다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그곳 노동자를 지켜보고는 실망하여 처음의 계획을 포기해버렸다.


    이렇듯 열악한 상황을 지켜본 김대지는 국내에서의 항일운동단체의 한계성을 절감하고 1917년 10월 이후 만주지방(길림, 봉천 등)을 왕래하면서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한 지사들과 새로운 비밀결사 지하단체조직을 모색하였다. 이때 그가 주로 접촉한 인물로 동향인 손일민 , 이종암, 구영필 등이 확인된다. 이종암, 구영필과는 1917년 12월경 봉천역에서 상봉하였으며, 김대지는 이들과 독립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기로 뜻을 모았다. 당시 이종암은 그가 근무하고 있었던 대구은행에서 1만 9천원의 거금을 인출하여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가 가능했다. 그러나 마침 발발한 세계제1차대전의 여파로 해외출국이 어려워지게 되자 이종암과 구영필은 상해로 가고 김대지는 군자금을 더 확보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다가 1918년 5월경에 일본경찰에게 피검되어 버렸다. 힘든 옥살이를 겪고 난 김대지는 출옥 후 고향인 밀양으로 잠입하였다. 그는 2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군자금의 확보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대한광복회 조직이 거의 와해되었으므로 새로운 비밀결사 조직의 동지 규합이다. 그가 이러한 뜻을 품고 비밀리에 암약하던 시기는 3.1독립운동이 발발하기 직전이었으며 당연히 일경의 감시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결국 그는 일경의 감시망에 포착되어 임무를 중단하고 피신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는 재산을 처분하여 비축한 자금과 일부 친지들의 의연금을 가지고 아직 어린 두 남매, 임신 중인 부인, 그동안 뜻을 함께했던 동지들의 따뜻한 전송도 받지 못한 채 야밤에 고향을 떠나 해외망명길에 올랐다.


    iii.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의 활동



    대지가 일경의 경계망을 피하고 본격적인 해외망명길에 올라 당도한 곳은 중국의 동삼성(東三省)이었다. 그는 이곳의 독립투사들과 의논하여 길림성(吉林省), 영고탑(寧古塔)(현재 흑룡강성 영안현)에 토지 수십만 평을 구입하여 농장을 건설하는 일에 주력하는 한편 독립투쟁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가 국내에서 마련해온 대부분의 자금도 여기에 투입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9년 3월 하순경에 중국 동삼성의 독립운동자대표의 일원으로 김동삼, 이시영, 조소앙, 이회영 등의 지사들과 임시정부수립준비를 위해 상해로 갔다. 이 무렵 상해에서는 각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집결하여 그 숫자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거류민단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가 개최되고, 김규직, 이시영 등 30여명이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조계지역에서 현순을 총무로 한 임시 사무소가 개설되면서 임시정부수립운동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준비위원들 사이에 관료조직, 국호, 구황실대우 등 몇 가지 기본문제에 의견이 상충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문제는 1919년 4월 10일 29명의 애국지사가 프랑스 조계 지역에서 회합하여 임시의정원을 발족시킴으로써 공식적으로 다듬어져갔다. 의정원에서는 의장 이동영, 부의장 손정도를 각각 선출하였으며, 11일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의결하고 전문 10조로 된 임시헌장을 심의 통과시켜 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아울러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임하는 등 각료 명단도 발표하였다. 이와 비슷한 무렵에 국내 3개, 해외 2개 모두 5개의 임시정부의 공포가 있었다.


    김대지는 이러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의정원의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임정과 인연을 맺게 된다. 제1차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는 4월 10~11일 양일간에 개최되었는데 당일 출석한 의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대지, 현순, 손정도, 신익희, 조성환, 이광, 이광수, 최근우, 백남칠, 조소앙, 남정우,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김철, 선우혁, 한진교, 태희창, 신철, 이영근, 신석우, 조동진, 조동우, 여운형, 여운홍, 현창운, 김동삼」


    이들 의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국내 3.1독립운동을 추진한 49인이 보낸 현순, 손정도, 시베리아 만주등지에서 「근업회」「경학사」「한족회」「신흥무관학교」등을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해외 독립군기지를 구축했던 김대지, 이동녕, 이희영, 이시영, 조완구, 김동삼, 신채호,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선포하고 온 이광수,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여운홍,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여운형 등 당시 각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다.


    김대지를 비롯한 초창기 임정 요인들의 노력에 의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일원화된 정부로 그 활동이 개시될 무렵인 1919년 11월을 전후하여 김대지는 임시정부의 조사원 자격으로 그의 고향인 밀양에 파견되었다. 당시 임정은 교통국이나 연통제의 조직망을 활용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통괄 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 이들 기구의 활동 상황을 점검하는 등 특수임무를 위해 임정요인 중 적임자를 선장하여 파견하거나 현지인에게 그 임무를 부과하기도 했다. 김대지는 이러한 임정의 정책에 의해 신채호, 김구를 비롯한 다수의 요인들과 같이 자기고향의 조사원으로 임명된 것이다. 조사원은 국내 각 지방의 유력자, 재산가, 학교 , 종교 등의 실태를 조사하여 임정에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김대지가 이러한 임정의 조사원으로 밀양에 잠입한 것은 1919년 12월 말에서 1920년 1월 초경이었다. 그에게는 1년여 만에 다시 찾은 그리운 고향이지만 그의 행동은 지극히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즈음의 김대지는 이미 일경에게 임정요인으로서 중요 감시대상으로 지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대지는 야밤을 이용하여 그곳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여 밀양의 사회실태를 조사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조달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비밀리에 이루어졌지만 결국 부호들과 직접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밀고에 대한 엄청난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위험한 상황에서 그는 애타게 기다리던 가족, 친지들과 상봉하여 정담을 나눌 겨를도 없이 일련의 임무만을 수행하고 바로 떠나야 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김대지는 밀양에서의 실태조사를 서둘러 종결짓고 1920년 이른 봄에 고향과 작별을 고하고 떠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고향방문이 될 것임을 그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iv. 북경군사통일회의의 발족


    김대지가 밀양에서 임무를 마치고 상해로 돌아온 것은 1920년 봄경이었다. 그런데 당시 임정은 극심한 재정난에다 독립투쟁의 방법과 이념상의 갈등으로 침체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도 심각한 분열상이 노정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작성한 국내실태보고서도 사장되어 버렸다. 그러자 김대지는 임정의 활동에 대해 회의와 갈등을 느끼게 되면서 우울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마침 북경에서 옛 동지들로부터 항일독립운동의 활로를 위한 대사를 논의하자는 연락을 받게 된다.


    이즈음 북경에서는 신채호, 박용만 등이 이승만, 안창호를 중심한 임정의 외교독립론이나 실력양성론의 독립노선에 반대하여 독립군의 급진적인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전쟁론을 주장하고 있는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모여들고 있었다. 따라서 북경에는 상해를 떠난 무장투쟁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상당수 집결하였으며, 무장투쟁운동의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었다. 여기에 모인 독립운동가의 대부분은 군사적인 무력항쟁만이 민족독립운동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데 서로 의견을 일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동안 중국이나 만주지방에서 독립군의 항일무장항쟁은 다소 전과가 있었지만 독립군의 통일적인 지휘체제가 확립되지 않아 보다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점이 있다는 점도 공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박용만, 신숙, 신채호, 배달무, 김대지, 김갑, 장건상, 남공선 등을 비롯한 9인은 1920년 9월경 국내외를 망라한 각지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단체의 단일화를 통한 새로운 통일독립운동단체의 구성을 모색코자「북경군사통일회」를 발기하였다. 북경군사통일회는 발족 후 각 지방에 산재한 독립지도자들의 동조를 얻고 통합을 실현하기위해 대표자를 파견하였다. 김대지는 신채호와 같이 만주지방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의 첫 번째 임무는 이청천을 만나 그의 동조를 얻는 일이었다. 이에 김대지는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몇 일간의 백두산 일대를 헤맨 끝에 산기슭의 한 귀틀집에서 이청천을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독립운동 동지인 김동삼을 통해 서로의 경력과 활동상을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 쉽게 친숙해질 수 있었다. 김대지는 상해의 독립운동정세와 북경군사통일회의 발기인의 주장을 상세하게 이청천에게 전했다. 즉석에서 이청천은 북경군사통일회의 발기를 적극 옹호하며 독립군사단체의 통합도 적극 지지하였다. 김대지가 이청천과 독립운동문제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며칠을 머루를 무렵 연락원이 급보를 전해왔다. 청산리전투에서 참패한 일군들이 보복하기 위해 대부대를 동원하여 백두산 일대를 수색하면서 진군 해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일본군의 만주지역 독립군 소탕작전으로 인하여 백두산 삼림지대에는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다수의 독립군단이 은거하면서 독립군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김대지는 서로군정서 독립군에 합류하여 재빨리 이곳을 빠져나와 북만주의 액목으로 향했다. 일행은 도중에 일군을 만나 위기를 당하기도 하고 혹한과 기근으로 상상을 초월한 고통을 겪으면서 무사히 액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 마침 홍범도가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이청천을 찾아왔다. 김대지는 홍범도에게도 북경군사통일회의 발기인의 주장을 전할 수 있었다. 홍범도는 일찍부터 군대통합을 모색해오던 터라 즉석에서 양부대의 무조건 통합을 제의하였다. 김대지는 현장에서 양부대가 통합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김대지의 이와 같은 활약은 결실을 맺어 서로군정서는 1921년에 개최된 북경군사회의에 이진산, 송호, 성준용 등의 대표를 파견하였다. 위 회의에서 대표들은 상해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부정하고, 이를 즉각 해제하고 대신 1919년 4월 23일 국내외에서 국민대회의 명의로 선포된 한성정부의 법통인 「대조선공화국」을 건설하여 항일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삼아 국내외의 군사 통일을 이룩하자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따라서 북경군사회의에서는 대통령 이상용을 비롯한 대조선공화국의 내각 인선 작업도 병행하였다. 김대지는 내무총장에 선임되었다. 이어 군사통일의 방안으로 대조선공화국정부 산하에 국내외 각지의 독립군을 통일한 「대조선국민군」으로 편성하는 계획도 세웠다. 이 계획에는 박용만이 대조선국민의 총사령이 되고, 각지 군인은 징집, 군적부를 작성하는 한편 국내외 각지의 각종 군직을 임명하고 군사비를 징수하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군사통일회의의 성급하고 일방적인 조치는 그곳 동포사회에서 임정의 객관적 지위와 권위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유린한 처사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임정은 내부령 12호로 군사통일회의를 규탄하고 각 단체에 대하여 경계를 촉구하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결국 군사통일회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내외의 비난 속에 와해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군사통일회의는 임정의 존폐문제와 관련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의 방향과 방략을 재정립하는 국민대표회의 소집의 계기를 마련하고, 이후 독립군이 남, 북만주와 연해주에서의 실질적 독립군단의 통합운동을 촉진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v. 의열단의 창단과 활동


    김대지는 옥고를 치른 후 국내의 고향 밀양을 중심으로 폭력혁명을 수단으로 하는 비밀결사조직의 결성을 추진했으나 당시 사정으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재산을 처분하여 중국의 동삼성에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대동청년단」의 초대단장이며 후일 임정의 법무부위원이 된 남정우를 비롯한 안희제, 윤세복, 김동삼, 윤현진, 곽재기 등의 동지들과 수차례 만나 비밀결사조직의 창설을 논의하는 한편 이성우,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신철휴, 서상락, 권준, 김상윤 등 젊은 청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토록 주선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동지들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평소 지론을 펼쳤는데, 그가 제창한 내용을 요약하면,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의 방향과 지침은 이론적인 구호와 행동은 지양하고 오직 왜적고관을 저격 살해하고 국내의 주요 공공건물을 파괴하는 실력행사에 목표를 둔 비밀결사단체를 새로이 창설하고 실행해야만 우리 민족의 관심을 일으키고 왜적의 시민정책을 짧은 시일에 포기 중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폭력투쟁을 전제한 비밀결사조직을 창설하여 의협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많은 동지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지지에 힘을 얻은 그는 비밀결사단체의 창설을 서둘렀다.


    우선 그는 1919년 5월경에 임시정부의정원의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비서격인 고인덕을 대동하여 길림군정원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황상규와 길림에서 광복회를 조직하여 활약하고 있는 손일민을 만나 독립운동을 위한 투사 육성과 독립운동자금조달책을 협의하였다. 이들 3인은 독립운동의 동지이자 동향의 친지라 각별히 친근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특히 이들은 1년 전, 북만주에서 만나 비밀결사조직의 결성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으므로 상당히 깊이 있는 논의를 할 수가 있었다. 특히 평소에 자기 경험으로 군대조직은 가망이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황상규와 비밀결사단체 창단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거나 현재 재학 중인 이성우,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신철휴, 서상락, 권준 김상윤 등도 동참시켰다. 이들의 가세로 비밀결사조직의 결성은 6월경에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김대지는 젊은 동지들에게 상해지역 독립운동지사들의 동태와 실정을 알리고 무기와 폭탄 구입제조의 가능성도 거론하며 비밀결사단체를 통한 무력혁명의 정당성을 역설하여 그들의 동의를 얻어냈던 것이다. 김대지는 그가 1919년 4월 동삼성대표의 자격으로 임정의 제1차 의정원회의에 참석하면서 그의 친구 김동삼에게 부탁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중국인 주황(周況)을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폭탄제조법을 익히도록 조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직 비밀 결사단체의 이름을 정하지는 않았다.


    이 무렵 한 청년이 길림군정사를 찾아왔는데, 그가 바로 차후에 김대지의 추천으로 의열단의 단장이 된 황상규의 처조카인 김원봉(金元鳳)이었다. 김대지는 여기서 김원봉을 처음 대면하여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대지는 담대하고 침착한 김원봉이 마음에 들어 그를 지도하면서 차후 결성될 비밀결사조직의 일선에 세우기로 작심하였다. 김원봉과 의기가 투합한 김대지는 1919년 7월에 김원봉, 이종암과 같이 길림을 떠나 폭탄제조법과 그 사용법을 배우려는 목적으로 상해로 갔다. 그 때 상해에는 임정의 부속기관으로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이 있었는데 이 단체는 김성근, 임득산의 지휘 하에 폭탄제조와 사용법을 습득하고 있었다. 김대지는 김성근을 비밀리에 만나 협의한 후 김원봉, 이종암이 구국모험단 단원들과 함께 폭탄제조법과 사용법을 배우도록 주선하였다. 한달 후 쯤 김원봉은 길림으로 돌아가 곽재기를 상해로 보내어 폭탄제조기술자가 된 김성근을 길림으로 초빙, 나머지 동지들도 폭탄의 제조와 사용법을 익히게 했다고 한다.



    이처럼 김대지는 차후 결성될 의열단의 인원구성과 무기구입 및 제조에 이르기까지 주도면밀한 준비를 진행시켰던 것이다. 김대지는 1920년대에 의열단이 수차례 전개한 암살, 파괴운동에 사용된 무기와 폭탄 구입의 일을 전담하였으며, 기밀부에 소속되어 의열단의 극비 중요사항을 결정하는 과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사료된다. 의열단은 1924년 1월 김지변의 동경 이중교 폭탄 투척사건 이후 단원들 간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내부분열이 생기고 극도의 자금난으로 서서히 해체의 길을 걷고 말았다.


    이때를 전후하여 김대지는 김원봉을 멀리하였고 의열단 일에도 관여하지 않은 것 같다. 그 후 의열단은 1924년에 접어들어 세계적인 사회주의운동의 성장과 국내의 대중운동 및 사상운동의 발전에 부응하는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국내 서울청년회의 유력한 성원이었다가 상해로 이주 후 의열단에 입단하여 고위간부가 된 윤자영이 김원봉과 노선상의 차이로 다수의 사회주의 단원들과 함께 탈당하였다. 따라서 의열단의 활동은 급격히 침체하고 사실상 기존의 파괴, 암살 노선은 폐기상태에 빠졌다.


    vi. 만주지역 민족유일당운동에 진력


    무장독립투쟁 노선이 잠시 지지부진 하던 시기, 영고탑 일대에는 경신참변과 흑하사변 후 이곳으로 피신해 정착한 독립군들이 많이 있었다. 김대지는 이곳에서 옛 동료들인 김좌진, 권일우, 김월송 등과 종종 회합하여 현 상황을 분석하고 조선독립운동의 전도를 탐색하면서 새로운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차례의 토의 결과 김대지와 동지들은 다음과 같은 합의에 도달하였다. 우선 김대지의 연락망을 통해 상해에 있는 김두봉. 김원봉과 러시아령에 있는 이동휘, 문창범 등과 연락하여 그들의 의견을 들은 후 옛 친우인 정운해, 이백파 등 공산주의자들과도 의견을 교환하고 상의하여 견해를 일치시킨 다음「조선민족유일당북경촉진회」의 이름으로 만주에 있는 각 당파를 통일단합하고 일치단결하여 일제에 대항하자는 것이다.


    김대지가 이와 같은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모색하고 있을 무렵에 1926년 북경에서 「대한민족유일당북경촉진회」가 조직되었고, 상해, 남경, 광동 등지의 중국본토 및 국내에서도 민족유일당이 조직되었거나 조직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다. 물론 만주지역에서도 정의부의 주도로 정의부, 참의부외에 군소독립운동단체를 총망라한 「전민족유일당북경촉진회」를 조직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그 조직 구성에 있어서 개인본위조직론과 단체본위조직론이 대립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김대지는 조국독립운동에 필요한 만주지역 한인들의 모든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여 일제와 항전하기 위해서는 남북만주에 활동하고 있는 삼부(신민부, 정의부, 참의부)의 통합만이라도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1927년 여름 정의부의 핵심인물인 김동삼과 이청천을 해용현, 오상현에서 각기 만나 통합문제를 구체적으로 상의하였다. 특히 김대지의 옛 친구인 김동삼은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협동전선을 주장해온 터라 주의와 사상 여하를 불문하고 항일하려는 모든 역량과 단결하여 유일당을 결성해야 한다는 김대지의 의견에 적극적인 찬동을 표했다. 다음으로 김대지는 신안진에서 신민부 핵심인물인 김좌진, 정신을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하고 김좌진과는 영고탑에서 다시 만나 구체적인 토의를 했다.


    오래전부터 독립전선의 구축을 열망해온 김좌진도 3부 통일안을 적극 수용하는 한편 공산주의 진영과의 통합도 희망하였다. 여기에 고무된 김대지는 폐병의 고통도 감수하면서 당시 조선공산당의 만주총국에서 신민부에 대한 공작책임을 맡고 있는 김찬과도 아성(阿城)과 동경성(東京省)에서 만나 수차례의 상의 끝에 유일당결성에 대한 동조를 얻어냈다. 이러한 김대지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제2단계 삼부통합운동이 시작되었다.


    정의부의 김동삼은 1928년 4월 신민부의 김좌진을 방문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고 그로부터 5개월 후인 동년 9월에 길림성(吉林省) 영길현(永吉縣) 동구은가촌(三區殷家村)내 신안에서 삼부통일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이 회의는 각 단체내의 내분이 가열되어 오히려 「민족유일당재만추진회」와 「국민부」로 재조직되면서 대립양상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29년 5월경에 그래도 기대를 걸고 있었던 김동삼이 하르빈에서 밀정의 고발로 일본영사관경찰에 체포되고, 12월경에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 박상실이 쏜 총에 피살되어 버렸다. 이 소식은 만주지역 민족유일당 결성에 온 정열을 쏟고 있었던 김대지에게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더욱이 이 충격은 그의 지병인 폐병과 기관지염을 악화시켰다. 이후 그의 정신적 육체적 기력은 쇠잔해 버렸고, 술과 담배로 분통을 삭히면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려는 김대지의 앞길을 막은 것은 다름 아닌 궁핍한 그의 가정형편이었다. 1920년 중반 영고탑에서 처음 가정을 꾸렸을 때는 동지들의 도움과 밀양 처가의 지원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20년대 후반 이후에는 더 이상 재정 확보가 막혀 병든 자식을 병원에 데리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빈궁하였다. 김대지는 유상툰, 빈현, 하르빈 난민소 등지를 전전하다가 아성현에 정착하여 어린 시절에 조금 익혀 두었던 한의학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지하에서 항일운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아내와 2명의 자녀를 잃는 암담한 상황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태산같이 굳건하던 그의 의지를 일순간 무너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오랜 병마로 고생하다가 1942년 10월 26일 빈강성 파언현에서 그토록 열망했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51세의 나이로 영안하였다. 국내외를 오가며 오직 우리 힘에 의한 조국의 와전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안위와 가족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항상 생각하였던 일봉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그의 공적을 높이 선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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