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불교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한 김법린
조국독립의 염원이라는 신념을 가슴에 품고
민족불교의 구현자인 범산(梵山) 김법린(金法麟)은 1899년 경북 영천군 신녕면 치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김정택(金玎宅)과 김악이(金岳伊) 소생 1남 1녀의 장남이었는데, 본관은 김령(金寧)이었다. 그의 본명은 진린(振隣)이고 승려로서의 이름은 법윤(法允)이었는데, 중국에 망명하여 바꾼 이름이 법린이고 호는 범산이다.
유년시절에는 신녕보통학교에서 배웠는데, 그의 열두살 무렵에 나라가 망하였다. 그는 국망을 슬퍼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것이 그의 일생의 염원이 되었다.
내 나이 열두 살 때(1910년 - 합방당시), 조국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 통곡하는 어른들의 그 몸부림을 보았다. 그 분들의 서러워하던 모습이 내 일생의 가는 길을 지배하는 자극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평생 동안 조국독립(祖國獨立)의 염원(念願)이 유일의 신념처럼 몸에 배었을 것이다.
위의 회고에서 보이듯, 그는 유년시절부터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싹이 움텄다. 그런데 그 무렵 그의 부친의 사망으로 가세가 기울자 그는 고향 인근의 명찰인 은해사(銀海寺)로 1913년에 입산, 출가하였다. 당시의 사찰은 인재를 발굴하고, 그들에게 배움을 열어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은해사에서 양혼허를 은사로 모시고 출가한 그는 1914년까지 은해사에서 배우다가, 범어사(梵魚寺)로 승적을 옮기고 떠났다. 이는 그의 은사인 혼허가 대구포교당 포교사 근무, 범어사 강원의 교사로 부임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즉 은사를 따라 범어사로 온 것으로 이해된다. 김법린은 범어사에서 신식학교인 명정학교(明正學校) 보습과(중학과정) 및 구학교육인 강원과정(사교과)을 배웠다. 이 때에 국어학자인 권덕규와 독립투사인 서상일에게 배우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후일 그가 조선어학회 활동과 3.1운동에 참여한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시 범어사는 항일불교, 민족불교의 중심 사찰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범어사는 1912년 서울 인사동에 임제종 포교당을 개설하면서 민족불교의 중앙 본부의 역할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인재 양성 차원에서 명정학교 졸업생 중에서 엘리트를 선발하여 서울 유학을 보냈다. 그 대상자로 김법린이 선출되어, 그는 1917년에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김법린은 얼마 후, 불교계 신식학교인 중앙학림으로 편입하였다. 당시 중앙학림은 전국 각처의 우수한 청년승려들이 입학하여 배우던 학교로 불교에서는 가장 선진적인 신식학교이었다. 그래서 중앙학림의 청년승려들은 불교와 신문명을 배우면서 불교계와 민족의 진로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그 고민의 무대가 유심회라는 자생적인 조직체이었다. 바로 이럴 즈음, 3.1운동 당시 민족대표(33인)이었던 만해 한용운은 서울 계동, 자신의 집에 [유심]이라는 계몽지를 발간하면서 민족 청년들의 각성을 고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따금 중앙학림의 특강에 나가서 학승들을 지도하였다. 이런 흐름은 자연스럽게 한용운과 김법린을 비롯한 중앙학림의 학생들과 끈끈한 연계를 갖게 하였다. 특히 김법린은 [유심]지에 철아(鐵啞)라는 필명으로 기고도 하였다.
3.1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하루 전날인 1919년 2월 28일 밤 열시 한용운은 그를 따르던 중앙학림의 학생들을 자신이 처소로 불러들였다. 여기에서 만해는 3.1운동에 임하는 자신의 소회와 학생들에게 당부를 개진하였는데,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환희의 감정이 가득했다. 만해는 3.1운동 준비, 불교계 교섭, 시국인식, 독립선언서 등 운동 전반에 대한 그간 경과를 전하면서
군등(君等)과 이제 분수(分手)하면 언제 만날지 모른다.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쾌연히 나선 우리는 아무 애(碍)도 없고 포외(怖畏)도 없다. 군등도 우리의 뜻을 동포 제위에게 널리 알려 독립완성에 매진하라. 특히 군등은 서산(西山) 사명(四溟)의 법손(法孫)임을 굳이 기억하여 불교청년의 역량을 잘 발휘하라.
라고 발언하였다. 한용운의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는 당부를 받은 김법린은 동료들과 함께 범어사포교당(인사동)으로 가서 만세운동의 전개대책을 숙의하였다. 역사적인 3.1절 그날, 김법린은 탑골공원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3월 4일, 김상헌과 함께 범어사로 내려가서 범어사 만세운동을 추동하였다. 김법린은 범어사 학인들과 협의하여 선언식을 거행하고, 선언서를 등사하여, 30여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범어사 인근 동래에서의 만세운동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4월 하순에는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상완, 백성욱, 김대용과 같이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 있었던 김법린은 임시정부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파견되었다. 국내에서 그는 불교계 동지들에게 상해 임정의 소식을 전하였다. 그 연후에는 만주 안동현으로 건너가 동광상점이라는 쌀가게를 내고, 그곳을 근거로 상해와 국내간의 비밀 활동을 하였으니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혁신공보]의 발행이었다. 그 후에는 상해 임정의 밀령에 의하여 독립사료의 집성과 전달에 나섰다. 그는 임시정부가 한국독립의 타당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집을 발간함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고, 그를 초록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수집한 자료를 들고, 농부로 위장하여 상해로 향하였다.
당시 상해에 모였던 승려들이 추진한 것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집과 불교계의 힘을 총집약하는 조직체인 의용승군의 조직이었다. 이런 구도에서 범어사, 통도사의 재원이 임정에 전달되고 중견승려가 임정고문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학승 김포광이 불교대표로 상해에 파견되었다. 또한 중견 승려 12명의 이름으로 발표한 불교 승려선언서가 상해에서 발표되었다. 그 연후 김법린은 의용승군의 조직체의 가동을 위해서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래서 그는 범어사, 석왕사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기밀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1920년 4월, 신상완이 검거됨으로 인해 일제의 검거망에 걸려들었다. 당시 김법린은 일제에 피체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미래 준비를 하면서, 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다
김법린은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자신의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독립운동을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보다 먼 미래를 위해 학업을 재개할 것인가이었다. 그는 학업의 재개를 결정하였다.
나의 스물두 살에 이르렀고 젊음을 구사(驅使)하기엔 무엇인가 내 안에 허전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 길로 만주(滿洲)로 가서 독립군(獨立軍)에 가담할 것이냐, 아니면 미주(美洲)로 건너가서 학업(學業)을 계속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심각히 생각하던 끝에 우선 다시 상해로 가서 영어(英語)와 중국어(中國語)를 공부하기로 했다.
그래서 1920년 4월 남경의 금릉대학에 입학하였다. 그 대학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면서 미국유학을 생각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단념하였다. 그 무렵 유능한 중국청년들을 선발하여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는 유법장학회(留法?學會)가 있었는데, 김법린은 그 장학회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기존 이름인 김법윤을 김법린으로 개명하고, 범어사에서 보내준 여비와 [佛和辭典] 1권을 들고 프랑스로 떠났다. 1921년 2월, 그는 상선을 타고 싱가포르 해협과 인도양을 거쳐 40일 만에 프랑스의 마르세이유 항에 도착하였다.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그는 어느 부호의 집에 들어가서 청소부를 하면서 불어를 배웠다. 그는 고등학교, 파리대 부설 외국인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파리의 동포들을 규합하여 한인친목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23년 11월, 파리대학교(소르본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1926년 7월,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은행에 근무하면서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바로 이럴 즈음, 김법린에게 새로운 도전이 다가왔다. 그는 1927년 2월 10~14일,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이었다. 이 대회는 한국 독립운동역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대회이다. 이 대회에는 세계 각국의 21개국 174개 단체가 참가하였다. 조선에서도 이 대회를 독립운동의 여론 조성의 기회로 인식이 팽배하였다. 그래서 조선대표로 4명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김법린, 이극로, 이미륵(이의경), 황우려이었다. 김법린은 파리한인회 회장 자격으로, 이극로와 황우일은 서울 한인작가 언론인 협회 소속으로, 이미륵은 재독 한인학생회 소속으로 대회 본부에 등록하였다. 김준연과 허헌은 비공식적으로 대회를 참관했다.
대회는 예비회(2.5~9)와 본회(2.10~14)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그 대회에 참가한 조선대표 4명은 조선대표단을 구성하였는데, 단장은 이극로가 맡았다. 김법린은 본회 첫날인 2월 10일, 조선의 태극기가 게양된 회의장에서 일제를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2월 14일, 최종회에서 김법린은 '아세아민족회'의 조선 측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리고 이날, 조선대표단은 '한국대표단 결의안'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한국 독립의 확보, 한국에서 일본 스스로 취한 모든 권리는 헛된 시도라는 요지의 내용이 담겨 있는 문건이다. 그리고 조선대표는 대회의 개최 이전에 한국 식민통치 상황, 독립투쟁의 의지 등을 정리한 8쪽 분량의 책자인 [한국의 문제(das koreanche probiem)]를 각국 대표에게 전달하였다. 이 책자(이미륵 소장본)는 독립기념관에 기증, 보관되어 있다. 이 책자의 저자는 전하지 않는데 재독 유학생단체 소속의 유학생들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김법린이 대회에서 행한 연설문의 내용이 전하고 있다. 그는 베를린 노이어 도이처 출판사(neuer detscher verlag)에서 대회 의사록을 모두 독일어로 번역하여 [에그몽 궁전의 봉화]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자에는 김법린 연설문의 전문, 한국 참가자 명단과 직책, 한국 대표단의 결의안이 수록되어 있다. 김법린 연설문은 그의 영문명 kim fa lin으로 전하는데, 7쪽 분량이며 35분 정도의 낭독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법린 연설문은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 보고]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고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서론에서 일본의 제국주의, 영토 확장의 역사를 비판하였다. 당시 일제의 영토 확장 정책은 첫째, 동아시아 영토 확장의 일환으로 일제가 한국에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고 둘째, 미국 및 대서양에는 이민을 통한 평화 침투를 셋째, 중국서부 및 몽골의 침투로서 시베리아의 경제적 이익을 강탈하는 것이라고 서술하였다. 그러면서 일제의 그런 정책은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비판했다. 본론에서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폭력(1장)과 일본의 한국 점령(2장)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1장에서는 강화도조약부터 1910년 일제 강점까지의 불평등한 관계와 역사를 요약하였다. 2장에서는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이후에 한국이 성장, 발전되었다는 논리를 반박하는 내용을 서술했다. 김법린은 이를 위해서 행정조직, 사법행정, 교육, 경제정책과 식민지화, 노동 등의 5개 분야에서 식민통치 실상을 조목조목 설명하였다. 결론에서는 한국에서의 일제 식민지 통치책이 국제 사법 정책 중에 가장 범죄적이고 추악한 사실이 명백하기에, 문명과 인류를 더럽히는 수취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제 범죄를 단죄하고 처벌해야 됨을 역설하였다. 이렇듯이 김법린이 유럽을 비롯한 각국의 대표자들에게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객관적으로 제시한 것은 독립정신 구현 그 자체이었다.
고국에서 독립정신을 펼치다
김법린은 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고 나서,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해 12월 9~11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반제국주의연맹 총회에 최린과 함께 참석하여 한국의 실정을 보고하였다. 그후 김법린은 프랑스에서 학업을 지속하려고 하였으나, 국내 불교계의 간곡한 귀국 요청으로 1927년 중반 귀국을 결심하였다. 국내 불교계, 즉 재단법인 교무원에서는 그의 귀국 보조비를 결의하였다. 범어사 3.1운동 동지인 김상호는 전국 사찰을 돌며 그의 귀국여비를 모금하고, 김법린에게 국내 불교를 위해 일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마침내 그는 네덜란드에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1928년 1월 14일 귀국하였던 것이다.
좀 더 공부하야 박사학위나 얻어 가지고 오려 하였으나 고국 떠난 지도 오래였고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간절하매, 본국에서 일하는 분의 일을 돕는 것이 그곳에서 학창생활을 더 계속하느니 보다 낫겠다는 생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칠팔년 전에 본국에 돌아오니 모든 것이 많이 변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 안을 중심으로 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래는 교육계에 힘쓰며 더욱 학술방면에 연구코자 합니다.
이와 같이 국내에서 민족, 불교를 위해 일하겠다는 다부진 마음을 표현하였다. 귀국한 그는 범어사, 각황사 등에서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권상로가 주관하는 잡지사인 불교사에 입사하였다. 불교사는 당시 유일한 불교계 잡지인[불교]지를 발행하였는데, 식민지 불교정책을 비판하고 불교의 미래를 제시하던 불교지성의 터전이었다. 김법린은 그 잡지의 학술부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구라파 지역의 불교학 동향을 상세하게 전달하였다.
이렇게 귀국 후 강연, 기고 활동을 하던 그는 점차 국내 불교계의 모순, 문제를 파악하였다. 그는 그 문제 해소를 위한 활동에 나섰거니와 그는 1928년 조선불교청년회의 재건, 1929년 1월 3~5일 각황사에서 열린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 개최의 주도이었다. 그가 주도한 승려대회는 일제 사찰령의 부정, 불교의 통일운동, 종단 건설운동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대회는 성사되어 불교계 자주적인 규율인 종헌(宗憲)을 제정하고, 종단 성격을 갖는 교무원 및 종회를 출범시켰다. 이런 결실은 불교 자주화 운동사에서 있어서 귀중한 의미를 갖는다. 불교계 구성원은 종헌에 의거하여 자주, 자립의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그 대회의 진행을 감시하면서 대회의 파장을 예의주시하였다. 그래서 김법린을 경찰서로 구속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김법린이 주도한 종헌 제정은 근대불교 최초의 자주적인 의사 결정, 불교의 근대적 시스템화라는 역사를 남겼다. 그러나 3~4년 후, 종헌체제는 일제의 억압, 친일적 주지들의 비협조로 해소되었다.
이렇게 귀국 즉시 다양한 활동을 하던 김법린은 자신의 학문을 더욱 정비하기 위해 일본유학을 단행하였다. 그는 일본 고마자와(駒澤)대학에서 초기불교 언어와 인도철학을 공부하였다. 바로 그럴 즈음 국내의 불교청년들은 항일 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결성했다. 만당은 자주적 불교화, 민족불교 지향을 위한 것이었다. 그 주도는 김법린과 함께 불교혁신에 나선 동지들이 추진하였다. 만당의 성격과 노선은 아래의 선언문에 나온다.
보라! 3천년 법성(法城)이 허물어져는 가는 꼴을
들으라! 2천만 동포가 헐떡이는 소리를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의분에서 감연(敢然)히 일어선다.
이 법성(法城)을 지키기 위하여, 이 민족(民族)을 구(救)하기 위하여
향자(向者)는 동지(同志)요 배자(背者)는 마권(魔眷)이다. 단결(團結)과 박멸(撲滅)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안으로 교정(敎政)을 확립하고 대중불교(大衆佛敎)를 건설하기 위하여 신명(身命)을 도(睹)하고 과감(果敢)히 전진(前進)할 것을 선언(宣言)한다.
만당은 비밀엄수, 당의 절대 복종을 약속한 당원만 선발하였는데 전국적으로 80여명에 달하였다. 강령은 정교분립, 교정확립, 불교대중화를 표방하였는데 불교의 자주화, 식민불교에 저항을 통한 민족불교를 표방하였다. 일제에 저항 노선을 갖고, 비밀리에 결성되었으며, 당수로 한용운을 추대한 것 등을 보면 만당은 민족운동의 결사체임이 분명하였다.
김법린은 일본에서 만당 결성의 소식을 듣고, 즉각 만당 일본지부의 결성에 나섰다. 그래서 다수의 불교청년들을 당원으로 포섭하였다. 그리고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동경 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다가 1932년 3월 김법린은 귀국하였다. 귀국한 그는 그의 모교인 중앙불전에서 원전 중심의 강의를 하였다. 이는 그가 근대불교학의 전수자임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불교]지에 식민불교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다수 기고하였다. 그 가 귀국하기 직전부터 한용운이 불교사의 사장을 맡으면서, 그 이전보다 일제의 불교정책과 및 나약한 친일주지를 비판하는 글이 더욱 게재되었다. 아래의 글은 김법린의 논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찰령과 그 시행세칙은 조선불교의 교무행정에 대한 일체를 간섭하여 그 내부적 자주권을 부인하고 있다. 사법의 시행, 주지의 임면, 寺有재산의 처분, 사찰의 조직 등 일체가 정치 당국의 손에 달려 있다. 실로 조선불교의 一動一靜이 위정자의 재가를 기다려서 비로소 된다.
그는 일제 불교정책과 그에 기생하는 불교 구성원들의 행태를 강력 비판하였다. 그는 불교지에 이와 같은 성향의 글을 다수 기고하였다. 그런데 그의 이런 입장은 한용운의 노선을 지지하는 현실인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용운은 기존의 산중중심, 승려 중심의 불교를 비판하고 대중중심의 불교를 제창하였다. 한용운 불교혁신의 논리는 대중불교론(大衆佛敎論)이었다. 그래서 김법린도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민중본위적 불교운동]을 주장하였다.
산사로부터 도시에로 승려본위로부터 신도 본위로 은둔적 독선적 불교로부터 사회적 경제적 불교로 진출하자! 즉 민중 본위의 불교운동의 제창은 現下 조선불교 갱신운동의 당면안 중 하나다. (중략)
종교는 사회적 현상이다. 대중의 교도(敎導)가 그의 천직이요, 대중과의 접촉이 그의 생명이다. 이 천직을 망각하고 이 생명을 무시함이 현재 조선불교와 같은 자 없나니, 보라! 신조선의 전도에 적체한 제 문제에 대하여 조선불교는 어떠한 지도적 방안과 독실적(篤實的) 분투로서 그 시급한 해결을 성원 기도하는가?
이렇게 그는 한용운의 대중불교론을 한 단계 진일보시킨 구체성을 띤 대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그는 중앙불전 강사를 역임하면서 교육을 통한 민족자각에 나섰다. 그리고 새로운 불교혁신론에 입각하여 식민지불교를 극복하는 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불교계 내분이 있었다. 그는 교단 운영의 재정 문제와 함께 불교 노선에 대한 이견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 구도이었다. 그 결과 비밀 결사 만당의 자진 해소, 불교지의 휴간이 나타났고, 김법린은 중앙불전에서 퇴진하였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만당의 동지인 최범술이 주지로 있는 다솔사로 칩거하였다. 그는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다솔사 강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후일을 대비하였다.
민족역사, 민족의 언어를 갈고 닦다
경남 사천의 다솔사에는 동양철학의 귄위자인 김범부도 거주하였다. 그래서 최범술, 김법린, 김범부라는 지성적 엘리트들의 집합처인 다솔사는 자연적으로 민족지사들의 모임처가 되었다. 그리고 만당의 당원, 한용운, 경남지역의 민족지사들이 왕래하는 명소가 되었던 것이다.
범산(김법린, 필자주)과 나는 사천 다솔사에서 그곳 주지이며 동지인 최범술과 더불어 학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범산은 역시 다솔사 원장으로 있으면서 틈틈이 불경과 한국역사를 교수하며 조국정신을 고취하기에 진력하였다.
김범부가 다솔사 시절을 회고하는 위의 내용에 김법린의 당시 정황이 단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1935년 9월, 다솔사 강원과 해인사 강원이 합병되었다. 그러자 김법린은 해인사 불교전문 강원의 원장을 맡았다. 그러다가 1936년 1월에는 범어사로 옮겨가서, 범어사 불교전문 강원 학감을 맡으면서 후배 승려들을 지도하였다. 그는 다솔사와 범어사 강원에서 불교, 영어, 역사 등을 강의하면서 민족의식,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특히 해인사에 있을 때에는 팔만대장경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조선민족 및 불교문화 재건을 고민하였다. 그런 고민을 후배 승려들에게 전하였음은 물론이다. 범어사에서 그의 강의를 들었던 제자들은 김법린은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우리 민족의 반드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도록 강의하면서, 각자의 재주를 갈고 닦아 나라의 독립운동에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회고하였다.
그런데 1938년 무렵, 항일 비밀결사체인 만당이 노출되어 당원들이 대거 일제에 체포되었다. 김법린도 진주경찰서에 3개월간 수감되는 고초를 겪었다. 모진 고문을 이겨낸 그는 범어사로 다시 돌아와 강원에서 강의를 지속하였다.
우리들은 임진란에 있어서 조선의 명장 이순신이 귀갑선을 만들어 일본군을 격파함과 같이옛 위인이 우리 조선을 지키고 충절을 다해서 장구한 조선역사를 보존해 왔음을 잊지 말고 옛 위인의 정신을 내 정신으로 해서 몸으로써 조선을 지켜 그 발전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렇게 그는 역사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남다른 노력을 하였다. 이는 교육, 민족불교를 통한 민족운동이었다. 그가 3.1운동 이래 한결같이 가져온 민족정신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범어사에서 강의하던 그 무렵부터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관여하였다. 그가 조선어학회에 참여한 것은 외국에서 유학하면서 모국어, 언어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진 것에서 나온 것이다. 더욱이 그는 초기불교를 공부하면서 불교 언어에 대한 많은 소양을 가진 학자이었다.그래서 그는 조선어학회의 사전 작업 시에 프랑스어와 불교용어의 심의와 자문을 맡았다.
조선인으로서 조선어를 모른다는 것은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을 잃고, 조선민족의 존재를 망각함에 이르는 것이다. 조선어의 발단은 조선민족의 발전에 지대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조선어의 쇠퇴는 조선민족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조선어를 연구하여 조선의 발달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법린은 조선어 자체가 민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조선어의 쇠퇴는 민족의 멸망을 의미하기에 한글의 발달을 적극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입장에서 조선어학회에 적극 참여하고, 분투하였다. 그렇지만 일제의 간악한 탄압으로 피체되어 1942년 10월 19일, 함남 흥원경찰서에 구속되었다. 그는 최현배, 이희승 등 12명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9차례의 공판을 받고 징역 2년 집행 유예 4년을 선고받고 1945년 1월 18일, 출옥하였다. 그의 구속으로 인해 범어사 강원은 강제 폐교를 당하였다. 그는 고문으로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범어사에서 요양,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독립의지, 민족의식마저 휴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방을 맞아, 불교와 민족의 진로를 걱정하다
1945년 8월 15일, 역사적인 해방이 되었다. 범어사에 있던 김법린은 그를 따르던 일단의 인사들과 함께 급거 상경하였다. 서울 선학원으로 간 그는 서울의 유지 승려들과 상의하여, 우선은 교단 집행부를 접수하였다. 8월 19일, 그는 중앙 교단이 있는 태고사(현, 조계사)로 가서 구 집행부들을 면담하고, 정상적으로 평화스럽게 종권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조선불교혁신회를 조직하고, 9월 22일 태고사에서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승려대회에서는 불교의 진로, 식민지불교의 잔재 제거, 해방공간의 불교 정책 등을 결정하였다. 이런 과정을 주도한 그는 조선불교 총무원장(總務院長)의 자리에 올랐다. 김법린과 함께 교단 집행부에 가세한 승려들은 일제하의 만당 당원들이었다.
새로 출발한 교단 집행부는 1946년 3월, 제1회 전국교무회의에서 결정한 노선을 신중하게 이행하였다. 그 결정은 교헌제정, 교구제 실시, 재산통합, 교도제 실시, 역경사업 발기, 일제 잔재의 제거, 광복사업의 협조 등이었다. 당시 김법린이 추진한 노선은 일제하 불교에서 한용운과 자신이 구상하였던 대중불교, 대승불교 노선이었다. 과거의 산간불교, 승려중심의 불교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불교로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노선은 혁신계열의 이의제기, 정치적 혼란, 미군정의 비협조 등으로 인하여 혼미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해동역경원 설립, 일제가 폐교한 혜화전문학교의 개교, 해인사에 모범총림의 개설 등을 추진하면서 점진적으로 불교 발전을 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신계열의 반발로 일시적으로는 교단이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더욱이 미군정의 사찰령 철폐, 사찰재산 임시보호법의 시행, 일본불교의 사찰 인수 등은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고민하였다.
몰이해한 이민족 이교도의 손에서 부대낌은 갱생의 길이 참으로 막연한 바가 있다.사해화(死骸化)한 사찰령으로 사찰재산의 동결을 꾀하는 위정자의 몰이해한 조치도 있어서 불교의 자산 신장과 자유산업 운영의 편익은 전연 희망이 없다.
불교 교단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그의 고민은 깊어 갔다. 그리고 혁신계열들은 대처승들을 승단에서 배척하여 교도의 지위로 내려오게 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 주장의 이면에는 비구승 중심의 승단을 만들자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만해 한용운의 주장인 대중불교, 대승불교로 가야 함을 역설하고, 그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교단의 분열이 깊어지자 그는 더 이상 총무원장의 직위에 있는 것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 대중불교의 좌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교계의 최일선에서는 후퇴하였지만 광복사업, 국가 재건사업에는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비상국민회의 대의원(1946.2),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의원(1946.12), 감찰위원회 위원(1948), 고등고시 위원(1949), 고시위원회 위원장(1952),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1953), 원자력 위원장(1959), 문교부 장관(1952), 부산 동래 제3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5.16이 일어난 직후에는 그의 모교이자, 불교계의 대표적인 대학인 동국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3년 7월에는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그의 열정을 마지막으로 쏟아 부을 대상으로 교육이 선택되었다. 그는 공부, 학문을 최우선으로 하는 노선을 제시하였다.
학문 없는 학원은 시체와 같고, 업적 없는 학자는 노래 않는 가수다. 백성을 괴롭히는 정치가 필요 없듯, 공부 않는 학생은 소용없다.
공부 제일주의, 학문 제일주의이었다. 그는 이런 원칙하에 동국대에 인도철학과 신설, 박물관 신설, 대학선원 등의 다양한 기관 설립을 추진하였다. 특히 승려들의 교육(종비생 제도, 특별교육)에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러나 그는 학교발전에 지나치게 매진하다 1964년 3월 14일 심장마비로 순직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66세이었다.
이렇듯이 그는 승려의 신분으로 민족 독립, 조국재건의 최일선에 서있었던 독립운동가, 교육자이었다. 그리고 그는 불교대중화, 대승불교운동을 제창한 불교혁신론자이었다. 그의 뜻은 비록 아직까지도 이 땅에 뿌리내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기개, 정열, 의지는 불교사, 민족독립운동사에 각인되어 있다.
범산, 김법린 그의 장례는 동국대학교장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그는 이 땅을 떠났으되 후학들은 그를 잊지 못하였다. 그의 1주기를 맞이한 후학은 그에 대한 감상을 다음과 같이남겼다.
그가 가신지 벌써 한해, 선장을 잃은 배는 그대로 제자리에서 배 전을 들이치는 파동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범산의 청사진은 배의 갑판 위에 펼쳐진 대로 휘돌아 부는 비람에 찢겨가고 있다.
겨레의 역사와 함께 배는 낡았을망정 그대로 현대사의 地圖를 항해할 수 있는 나침반은 있다. 다만 그 나침반을 읽고 용감하게 항해를 시작할만한 선장이 없다. 근해를 도는 뱃사공은 필요없다. 원대한 청사진을 펴고 遠海를 향하여 과감하게 출범하는 위대한 선장이 필요하다.
수많은 잔별이 반짝이고 있더라도 하나의 큰별이 떨어질 때 천지는 갑자기 어두워지는 법이다. 범산은 큰 별이었다. (韓守, [法隣은 가고 梵山은 남고]에서)
梵山 兄
兄님은 가시였소. 우리들을 참마 매치시고 兄님은 가시였오. 강물처럼 가시었나요. 구름처럼 가시었나요.
또 가셨으면 어데로 가셨나요. 오신 곳으로 가셨나요. 가신 곳은 따로 계신가요.
金井聖域에는 오신 소리 아직 여여하고 東國學園에는 가신 자취상도 완연한데 달 밝은 다락에서 敎界로 政界로 學界로 뛰었던 형님의 천년 꿈은 劫外에 서렸을 뿐 오실 때에도 말이 없고 또 가실 때에도 말이 없으니 당신의 침묵은 永劫의 비밀 위에 한 겹을 더 덮은듯 더욱 아득만 하여이다.(유엽, [梵山兄의 小기를 맞아] 중에서)
이렇듯 그는 영면의 세계로 갔지만, 그의 행적, 고투, 지향은 역사의 무대에 의연하게 남아 있다. 민족불교의 생생한 증거를 우리에게 남긴 그의 역사, 그는 살아남은 자들이 후세에 전하는 당위로 우리 앞에 표상으로 남겨져 있다.
[참고문헌]
- 김광식, [김법린과 피압박민족대회] [불교평론] 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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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식, [우리가 만난 한용운] 참글세상, 2010.
- 김광식, [한용운 연구] 동국대출판부, 2011.
- 김상현, [김법린, 한국불교 새출발의 견인차] [한국사 시민강좌] 2004.
- 권기현, [김법린의 생애와 독립운동] [밀교학보] 7, 2005.
- 김상현, [김법린과 한국 근대불교] [한국불교학] 53, 2009.
- 조준희 [김법린의 민족의식 형성과 실천] [한국불교학] 53, 2009.
- 이봉춘, [범산 김법린의 사상과 활동] [한국불교학] 53, 2009.
- 강미자, [김법린의 민족운동과 대중불교운동] [대각사상] 14,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