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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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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채응언 선생
「7월의 독립운동가」공적개요 채 응 언(蔡應彦) 선생 (1879 ~ 1915. 11. 4)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채응언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79년 평남 성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을사조약·정미조약 등 일련의 침략조약으로 국망이 가시화되고,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군대가 해산되어 민족의 무력이 말살되자 통분하여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한말 의병전쟁은 해산군인의 의병부대 참여로 더욱 가열되었다. 이제 위국헌신의 정신만이 아니라 정규군인 출신이 의병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전투성이 한층 강화되었던 것이다. 군대해산 뒤 의병전쟁에 투신한 선생은 처음 이진룡 의병부대의 부장으로 활동하면서 평안도·황해도·강원도 일대의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활발한 유격전을 펼쳤다. 1908년 황해도 안평(安平)순사주재소, 수안(遂安)헌병분견소를 공격하여 일본헌병을 처단하고, 또한 함경남도 마전동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다량의 무기를 노획하여 군비를 갖추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선생은 의병부대 해산을 거부하고 김진묵 의병부대의 부장으로, 혹은 단독으로 3,4백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일대의 산악지대를 넘나들며 신출귀몰하게 일본군수비대와 헌병을 공격하였다. 1913년에는 황해도 대동리헌병분견소, 선암헌병분견소를 기습하여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나아가 1915년에는 향리인 평남 성천군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경은 물론 친일 밀정 등 부일배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이 같은 항일 무장투쟁으로 일본군경 및 부일배 20여 명이 처단되자 일제는 ‘적괴 채응언수색대’라는 특설대를 조직하여 선생을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평양헌병대 산하에 일본헌병 1명과 한인 보조원 4명을 1대로 하여 모두 5개대 25명으로 짜여진 특설대는 선생의 행적을 샅샅이 추적하는 한편, 280원의 현상금을 걸어 일반인들의 밀고를 유도하였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선생은 1915년 7월 평남 성천에서 군자금을 조달하러 부하 병졸을 이끌고 마을로 내려오던 중, 잠복한 일본군경과 맞닥뜨렸다. 그리하여 적들과 치열한 사투를 벌여 전중(田中) 상등병을 부상시키는 등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평양헌병대로 호송되어 심문을 받은 뒤,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15년 8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살인·강도죄’로 사형을 받았다. 이 때 선생은 최후 진술에서,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는데 강도란 당치도 않다”고 일갈하여 굳건한 항일민족의식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1915년 9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10월 28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자 그해 11월 4일 형 집행으로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7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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