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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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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 공훈내용
부서 공훈관리과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에서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 사이의 세자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마리아는 개신교의 세례명인데 독실한 개신교신자였던 아버지가 지어주신 것이다.

선생의 집안은 서울의 명문양반가였으나 고조부 때 낙향하여 대지주가 되어 만석꾼 김참판댁으로 불려졌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일찍이 개신교에 입교한 뒤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종사하던 개화인사였다. 집안 내 개화문명에 남다른 관심과 적극적인 수용 덕분에 민족운동과 교육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 다수를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셋째삼촌 김필순(金弼淳)은 안창호와 결의형제를 맺은 신민회원으로 한국최초의 의사가 되어 만주 통화와 치치하얼에서 한인촌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셋째 고모 김순애(金淳愛)는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의 부인으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둘째 고모부 서병호(徐丙浩)는 신한청년당과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그 외에 한국 YWCA의 창설자이며 민족교육자였던 김필례도 넷째 고모였다.

이렇게 선생은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개화 지식인이자 애국지사였던 부친과 삼촌, 그리고 고모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가 되어 갔다.

1899년 선생은 부친이 세운 소래학교에 입학해 고모·언니들과 같이 다니면서 기독교의 박애주의와 평등사상에 입각한 신학문을 익혔고, 1903년 졸업하고 어머니를 도와 가사를 돌보았다. 1905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906년 서울로 이주하였다. 상경한 선생은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 기거하였다. 1906년 6월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비로소 기독교사상에 입문하게 되었고 신앙심이 깊어져 1908년 세례를 받았다. 이즈음 선생은 을사조약 이후 점증되던 국망의 위기의식 속에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맹렬하게 전개되던 구국계몽운동을 목격하고, 또 삼촌의 집에 드나들던 안창호·김규식·이동휘 등 애국지사들의 초조한 발걸음을 보면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더욱 키워 갔다. 그리하여 선생은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부임하여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하였다.

 

 

일본유학과 조선여자 유학생친목회 활동

 

1910년 8월 조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교육 계몽을 통한 국권회복의 꿈을 접지 않고, 한 톨의 밀알이 밀밭을 이루듯이 민족문제 해결에 여성들이 앞장설 것을 역설하였다. 선생은 알찬 후진교육을 위해 1912년 가을 1년간 히로시마 고등여학교에 유학을 다녀왔다.

1913년 은사들의 추천으로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사로 전임하여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고, 이듬해 선생의 재능과 조국에 대한 열정에 감동한 루이스 교장의 추천과 지원으로 일본의 동경여자학원(東京女子學院)으로 유학가게 되었다. 유학의 목적은 조국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1915년 5월 동경여자학원 본과(당시 고등여학교)에 들어가 1916년 3월에 졸업하고 이어 고등과(당시 전문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19년 3월에 졸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선생은 일본 유학생활 중 1915년 4월 막내 고모인 김필례와 나혜석 등이 중심이 되어 재경 (在京)조선여자 상호간의 친목 도모와 품성 함양을 목적으로 조직한 조선여자 유학생 친목회에 가입하였다. 이후 1917년 10월 임시총회에서 회장에 선출되어 일본 전체 여자유학생회의 대표가 되었던 것이다. 대표로써 이 단체를 확대시켜 갔으며, 『여자계(女子界)』를 기관지로 발행하였다. 이 기관지를 통해 여성의식의 자각은 물론 민족의식고취에 도 앞장섰다.

 

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

 

이즈음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1918년 1월 8일 전후 처리 지침으로써 미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그 해 11월 11일 종전이 이루어지면서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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