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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사자께 부채의식 가진 한국 여성
가진 것 없이 시작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한국 여성.
이길여 가천대 총장을 두고 언론에서 가장 즐겨 쓰는 표현이다.
그녀는 전북 옥구 `깡촌`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언제나 자신만만한 소녀였다.
현재 그녀는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 그녀도 한 남성을 바라보며 설레던 감정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메리 이매큘러트 병원, 퀸스종합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하던 유학 시절.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한국 남자가 꽃을 들고 그녀를 찾았다. 자수성가한 교포 사업가였다. 이성에 대한 호감이라기보다는 타국에서 말벗으로 지낼 수 있는 한국 사람이라는 데 더 끌렸다. 그녀는 화사한 원피스에 브로치를 달고 그와 데이트를 즐겼다. 몇 번인가 만남이 이어지면서 그 남자는 조심스럽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자의 청혼을 거절한 그날 밤 그녀는 밤새도록 울었다.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한 남자의 아내로, 한 아이의 엄마로 머물 수는 없었다. 조국에 있는 가난하고 못 배우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했다. 인천의 작은 산부인과병원 의사로 출발해 6개의 종합병원과 뇌ㆍ암ㆍ당뇨 분야 첨단연구소, 2개의 4년제 종합대학, 각종 문화재단, 언론사까지…. 남에게 지기 싫어 하루 4시간 이상 자지 않았던 그녀가 `행운`을 얘기했다.
"우리는 6?25전쟁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나보다 더 훌륭한 의사, 과학자가 될 수 있었던 내 또래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며 전장에 나갔습니다. 총도 없이, 아무 것도 없이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나갔다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지요. 난 여자라서 군대에 가지도 않았고, 시골에 있다 보니 피난 가는 고통도 없었습니다. 나 혼자만 이렇게 공부하는게 옳은 일인지 끊임없이 자문했지요. 난 빚이 있어요. 그 젊은이들 덕분에 공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4년여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 길을 서두른 것도 그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남보다 더 많이 배웠다는 사실, 남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는 무거운 부채의식은 그녀를 망설임 없이 귀국길 비행기에 오르게 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에는 각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그녀는 6.25전쟁으로 희생을 당한 또래의 젊은이들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강한 소명의식으로 인생을 정말 휼륭하게 살아오신 존경스런 분이다.
평소 6.25전사자께 부채를 의식하여 보훈업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점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국립산청호국원 직원 모두도 "호국영령의 고귀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편히 잠드소서!"란 슬로건을 가슴에 새기고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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