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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국방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




김정일국방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

- 한국전쟁발발 58년맞아, 6.25유복자가 38선을 달리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귀하
안녕하십니까?
조국의 계절은 이제 성하의 문턱에 와 있습니다. 그곳 평양도 요즘 인민들이 여름철 옷을 입고 대동강가나 을밀대를 거닐고 있지 않을까 저는 나름대로 생각해봅니다. 이곳 서울도 한강에서, 전국 바닷가에서 국민들이 물놀이를 즐기는 초여름 날씨랍니다. 장마가 시작되는 요즘 날씨입니다.

김 위원장 귀하
먼저 저를 잠시 귀하께 소개드리는게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대한민국건국의 경찰로서 경상북도 경주경찰서 안강지서장으로 근무하셨습니다. 전사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한해 전인 1949년 그해는 귀 공화국에서 남파한 빨치산들로 인해 무고한 국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목숨을 잃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의 그 시절이었습니다.
1949년 3월 23일 미명의 그 시각, 경북 경주 안강읍 ‘두류리전투’를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귀 공화국의 인민무력부 산하 빨치산 21명 대원들과 치열한 교전끝에 직원 2명과 함께 조국의 꽃으로 산화한 대한민국 건국의 경찰이신 고 유귀용(劉貴龍)경위와 원옥잠(元玉潛) 여사 사이에 태어난 유대지(劉大知, 58세)입니다. 그리고 선친께서는 국립현충원 경찰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전사 당시 27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고 어머니는 18세의 꽃다운 나이었습니다. 신혼의 단꿈도 채 이루지 못하시고, 제가 엄마뱃속에 있는 것도 모르신 채,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날 두류리전투의 비극은 우리가문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먹구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후 어머니도 지병으로 일찍 타계하고 오갈 데 없었던 어린 저는 울산 중앙시장에서 멸치행상을 하시던 할머니 슬하에서 삼대독자, 유복자, 유자녀로서 멸문지화의 그 파란만장한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되었습니다.
저는 20대 초반에 울산시지방공무원, 국가보훈처 산하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서 정년을 마친 후에, 지금은 종친회에서 상근이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는 20대에 동향의 처녀와 혼인하여 슬하에 네 딸을 두고서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인생의 언덕에 앉아 있습니다. 매년 찾아오는 유월이 되면 선친이 계시는 국립현충원을 가족들과 함께 참배하고 있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도 한 번도 듣지 못했고, 그 넓은 가슴속에 한 번도 안겨 보지 못한 저의 선친이기에 더욱 더 색바랜 사진을 바라보며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초원에 앉아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저의 삶은 전쟁이 가져다 준 눈물겨운 인생의 길이요, 가족사라고 저는 귀하께 감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김 위원장 귀하
한마디로 어릴 때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안 계시는 그 아픔을 아십니까?
김 위원장도 어릴 때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성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감수성이 예민한 그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면 아마도 먼 훗날 그 고통은 두고두고 가슴에 새겨진다고들 합니다. 그만큼 부모님의 사랑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합니다. 벌써 59년 전 까마득한 그 옛날 이야기지만, 저는 결코 잊지 못하고 이렇게 위원장에게 눈물의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귀공화국에서 국제적으로 조약된 조국의 38선 전역에서 아무도 모르게 막강한 화력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분명히 남침했습니다. 이 사실은 모든 전쟁문서에 엄중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거부할 수 없는 이 땅의 진실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후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될 때까지 3년1개월동안 이한반도에서 동족상잔의 그 피비린내 나는 그 유월전쟁의 참상을 어찌 다 글로서 이야기 하겠습니까?
이제 귀공화국에서 그해 왜 그전쟁을 일으켰는지 말해야 된다고 저와 국민들은 믿고있습니다. 지금도 위원장은 북침이라고 우기실겁니까?

이전쟁으로 이 땅에서 숨져간 수많은 고귀한 생명들, 소중한 문전옥답과 가옥, 울부짖는 어린아이들, 그 전쟁발발 후 58년이 된 지금까지도 우리주위에는 그 상흔이 그대로 남아서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괴롭히고 있습니다.
‘전쟁은 짧지만, 그 고통은 대를 이어 영원하다’고 저는 귀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 위원장 귀하
오늘은 바로 비극의 그 한국전쟁발발 58년이 되는 그새벽입니다. 그런데 귀공화국에서 2년전에 핵실험으로 세계 모든 사람과 우리국민들의 마음에 또다시 검은 전쟁의 그림자를 안겨주었습니다.

김 위원장 귀하
핵무기가 무엇입니까? 귀하는 핵무기의 위력을 아실겁니다.
바로 이땅에 모든 생명체를 일시에 사라지게 하는 가공할만한 무기가 아닙니까? 그 무서운 병기를 그토록 많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서 자꾸 개발하고 보유하고자 하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물론 귀공화국에서는 자위를 위해서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하지만 세계의 여론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말해서, 이땅에 제2의 한국전쟁 발발을 걱정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뇌를 아셔야 될것입니다.
얼마전, 귀공화국 매체에서 제2의 6.25발발, 그리고 제3의 서해교전을 예고하는 망말을 늘어놓았습니다. 한마디로 민족을 말살 시키자는 엄청난 말로서7천만 민족들이 분노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전쟁최대 피해자의 한사람으로서 오래전부터 동부전선 양양에서 굽이굽이 돌아 중부전선 임진각까지 우리민족의 한이 서린 38선을 부부가 함께 달리고 있습니다. 이행사를 시작한지도 어느덧 14년째요, 70회가 되어갑니다,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어머어마한 거리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저희 부부는 비극의 이전선을 자동차로, 걸어서, 자전거로 달리고 있으며, 지난 200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현지에서 자동차를 렌트하여 사상 처음으로 북미대륙 38선을 달리면서 전세계에 우리민족의 평화통일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김 위원장 귀하
김 위원장께서 저의 이 편지를 읽고 계실때면 아마도 저희부부는 38선 분기점을 출발하여 한계령을 넘어, 인제, 원통을 지나 중부전선으로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민족에게 다시는 그 끔찍하고도 몸서리치는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며, 조국의 평화통일을 바라는 7천만 국민들의 가슴에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 저희 부부는 이행사를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할것입니다. 더우기 전후세대에게 우리부부의 이 행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질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언젠가 귀공화국에서 승락만 해주신다면 반드시 옹진반도까지 완전한 민족의 38선을 달리고 싶습니다.

58년전 발발한 한국전쟁-
우리민족은 영원히 상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우리민족에게 크나큰 아픔으로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우리나라 속담같이 이제 남과 북, 우리민족이 아픈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의 희망을 가지고, 우리민족이 평화스럽게 사는 방법은 바로 이 땅에 전쟁무기를 상호 감축하고, 귀공화국에서 대한민국 새정부와 함께 힘을 합쳐서 세계의 흐름속으로 마음을 열고 나아 간다면 반드시 금수강산에 무궁화가 만개할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남북 6.25유자녀 사상 처음으로 유년기때 겪었야만 했던 저의인생길“ 달빛은 민들래를 비추지 않았다”제하의 육필수기집을 집필중이며 2010년에 영어판, 중국어판, 일어판을 출판할것이며, 그리고 귀하가 승인해주신다면 평양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지고 싶습니다.
출판수익금 전액은 반드시 전쟁양로원 건립기금으로 사용할것입니다.

김 위원장귀하
오늘 귀하께 감히 드리는 저의 이 말을 절대 나쁘게 듣지 마시고, 처절한6.25유복자가 그 오랜 세월동안 고뇌에 찬 이야기로 이해하셔야 될것입니다.
아무쪼록 한국전쟁발발 58년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셔서 우리민족에게 통일조국의 그 융성한 모습으로 찬란한 새역사를 꽃피우는 대결단의 한마음이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끝으로 유난히 무더운 올여름을 귀하께서도 잘 지내시길 바라면서 두서없는 저의 이야기를 마치고자합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6월25일 새벽 4시
동부전선 강원도 양양 38선출발 선상에서
대한민국 6.25전몰군경유자녀 유대지 드림

엠바고: 2008년 6월 24일 00: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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