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독립운동가 "김복한"선생님 | |
지산(志山) 김 복 한(金福漢) 선생님
(1860. 7. 24 ~ 1924. 3. 29)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 및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김복한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습니다.
선생님은 1860년 태어났으며, 1890년 음직으로 선릉참봉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가고, 뒤에 순종황제가 된 왕세자의 서연에도 참여하였습니다.
※ 해박한 경사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왕세자에게 유교적 소양을 쌓게하고 장차 국왕으로서 법도를 교육하는 서연에 참여함.
1892년 별시에 문과 급제한 뒤에는 홍문관 ·사간원 ·성균관 ·승정원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경연관으로 왕에게 유학을 강학하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1894년 승정원 우부승지에 올라 국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던 중 그해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갑오변란이 발생하자 이에 책임을 통감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홍주로 낙향한 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의 비보와 같은 해 11월 단발령 공포의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 12월 1일 내종형인 이설, 안병찬 등 재지 유생들과 함께 180여 명의 민병들을 모아 거의하고 홍주성에 창의소를 설치하였음.
그러나 의병에 참여하였던 홍주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여 선생 등 의병 지도부를 구속하는 바람에 홍주성은 친위대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어, 서울로 압송된 선생은 10년 유배형을 받고 국왕의 특지로 석방되었지만, 각기병을 얻어 보행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선생은 분연히 일어나 상소투쟁을 벌였으며,
※ 이설과 함께 상경하여 을사 5적을 처벌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일 본세력을 축출할 것을 요청한 것이 그 내용임.
을미의병의 동지인 안병찬 등에게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민종식을 추대하여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떨쳤지만, 일본군의 공격으로 성을 빼앗긴 후 의병 지원의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 3 ·1운동이 일어나자 강화회의가 개최되는 파리에 글을 보내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는 장서운동을 계획하고 영남과 호서 유림의 대표가 연명한 파리장서를 만들어 보냈습니다. 이로 인해 징역 1년을 받아 또 다시 옥고를 치루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24년 3월 29일, 6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3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입니다.
<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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