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 | |
◈ 상해 국민대표회의 의장, 정의부 간부로 활약한
김동삼(1878.6.23~1937.4.13) 선생 ◈
국가보훈처(처장 박유철)에서는 광복회와 공동으로 한말 협동학교에서 민족교육을 전개하고, 상해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활약한 김동삼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습니다.
선생은 187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1907년 유인식과 함께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경술국치를 당하자 독립운동을 위해 1911년 서간도로 망명,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13년에는 재만 한인 자치기관으로 부민단을 조직하고, 신흥강습소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백서농장을 개설하여 둔전병 방식의 독립운동 전략을 실행하였습니다
3·1운동 직후에는 부민단을 한족회로 개편하고, 임시정부를 받들어 모시는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섰으며, 1922년에 통군부를 대한통의부로 확대 개편하여 만주지역의 독립군 단체를 통일적으로 재건하였고,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위해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여하여 의장으로 선출 되셨으며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갈등을 조정하여 통일기관 조직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자 만주로 돌아와 1924년 정의부를 조직하여 한인 자치와 무장투쟁을 벌였습니다.
정의부 대표로 참의부·신민부·정의부 등 3부를 통합하여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조직하려는 뜻이 실패로 돌아가자 정의부를 이탈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그를 중심으로 신민부 군정세력과 함께 1930년 만주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고문으로 활약하였습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침략을 도발하자 북만주로 이동하여 강력한 항일 무장투쟁을 추진하다가 하얼빈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 피체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7년 4월 13일 옥중에서 순국하셨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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