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독립운동가 '오의선'선생님 | |
오 의 선(吳義善) 선생님
(1889. 12. 8~1931. 5. 6)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오의선 선생님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습니다.
선생님은 1889년 경기도 용인에서 부친 오인묵과 모친 구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가풍에 따라 한학을 배우며 인격을 도야하였고, 보성전문학교와 일본 명치대학에 유학하여 신학문을 수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통 한학의 토대 위에서 신학문을 습득함으로써 신구학문을 겸비한 근대 지성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일본 명치대학에 유학하던 시기 재일 조선인유학생학우회에 가담하여 활동던 중 동경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선포한 2·8독립선언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민족 독립의식을 표출하여 갔으며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선언식 참여를 독려하고, 독립선언서를 널리 배포함으로써 2·8독립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습니다.
2·8독립선언 직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는데, 경기도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동참하였으며 나아가 세칙제정위원, 청원법률심사위원, 예산결산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초기 임시의정원의 골격을 세우고 임시정부를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 지도기관으로 만드는데 힘썼습니다.
이후 1921년 북경으로 옮겨가 무장투쟁론자인 박용만계열의 인물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서북간도 및 노령지역의 무장독립운동세력의 통일에 노력하고,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습니다. 또한 국내에 동지를 파견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배후 지도하다가 몸소 국내로 들어와 활동도 하였는데, 국내로 잠입한 뒤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새로운 민족혁명 이념으로 전파된 사회주의에 공감하여 사회주의운동가로 변신하였습니다.
더욱이 네 차례의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사회주의운동가들이 대거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국제혁명자후원회의 국내 책임자가 되어 감옥에 갇힌 혁명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다가 1931년 3월 향리인 용인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심한 고문으로 같은 해 5월 6일 옥중에서 42살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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