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독립운동가 "장지연" 선생님 | |
장 지 연(張志淵) 선생
(1864. 11. 30~1920. 10. 2)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남의 노예된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단군기자 이래 사천년을 이어온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 선생의 「시일야방성대곡」중에서(1905. 11. 20)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장지연 선생님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조선시대 예학의 대가 가운데 한 분인 장현광의 12대 후손으로, 1864년 경북 상주에서 부친 장상용과 모친 유씨 사이의 독자로 출생하여 어려서 장석봉에게 유학을 공부하였고, 이후에는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허위’의 형인 ‘허훈’ 문하에서 수학하였습니다.
허훈은 기호남인으로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허전의 제자였으므로, 선생은 심성과 예학을 중시하는 영남유학과 현실 개혁을 중시하는 기호남인의 실학을 겸비하였던 것입니다.
1894년 초시에 합격한 뒤 1896년 상경한 선생은 새로운 인물들과 만남을 통해 사상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즉, 서구열강을 금수로 보았던 종래의 화이론적 척사관에서 서구열강도 의리를 아는 국가이므로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대외관으로 변화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경험하면서 국가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해결방안을 찾았고, 결국 성호학파계열의 실학과 자신의 사상을 접목시켜 진보적인 개화사상가이자 개신유학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898년 황성신문의 창간에 참여하고, 1899년 시사총보의 주필로 계몽적 언론인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선생의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활동은 1902년 황성신문 주필 겸 사장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1905년 11월 일제의 을사조약 강제 체결을 통렬하게 비판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촉발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이 논설로 인하여 선생은 일제 헌병대에 피체되어 4개월 간의 고초를 겪었지만, 선생의 독립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일제의 압력으로 황성신문 사장을 사임한 뒤에도 1906년 국권회복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의 창립과 1907년 국채보상운동 등을 주도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나아가 우리의 강역과 역사를 다룬 고전들을 발간하고, 몸소 역사 연구를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정신을 배양하며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갔습니다.
이 같이 일제로부터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선생의 노력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시대적 격변과 망국의 비운을 체험하면서 울분에 쌓여 병을 얻었던 선생은 1920년 11월 1일(음력 10월 2일), 마산 자택에서 5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11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입니다.
< 자료 국가보훈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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