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독립운동가 "홍학순" 순국선열 | |
홍 학 순(洪學淳) 선생 (1904. 8. 15 ~ 1934. 5. 18)
국가보훈처에서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홍학순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습니다.
1904년 8월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고향에서 3·1운동을 경험하면서 민족의식이 고양되었는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유여대' 선생이 주도하여 기독교와 천도교 인사들이 대대적으로 전개한 의주의 3·1운동은 조국 독립과 민족 해방에 대한 투철한 의식을 촉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3·1운동 직후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 같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리하여 1924년 2월 만주 관전현에서 '김석하'의 소개로 대한통의부에 가입한 뒤 무장투쟁 방식으로 본격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통의부 독립군으로 여러 차례 국내에 진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고, 1924년 11월 정의부가 성립한 뒤에는 그 산하 의용군 5중대 참사로 맹활약하였습니다. 특히 1927년 7월 국내로 진입하여 평북 구성군 조악주재소를 공격하여 일경을 처단하고, 의주 읍내 금융조합에 쳐들어가 900여원의 군자금을 노획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어 1927년 8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양동작전으로 식민지 수탈기관인 식산은행 의주지점과 용만금융조합을 동시에 공격하여 980여원의 군자금을 노획하였으며, 이듬해 9월에는 요녕성 토산자에서 일제의 밀정을 처단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1929년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통합조직으로 국민부가 성립되고, 그 산하 무력으로 조선혁명군이 결성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는데, 같은 해 9월 조선혁명군 동지들과 함께 평북 삭주의 광산사무소를 공격하여 시가 2,300여 원어치의 금괴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던 것입니다.
이후에도 조선혁명군 동지들과 함께 압록강 하류 국경지방인 평안도 일대에 출몰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 군경과 여러 차례 격전을 벌여 적들을 처단하였으며, 특히 1931년경 평북 국경지방에서 일경과 여러 차례 교전하면서 삭주와 구성 등지의 금광과 친일 부호배를 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적들을 살상하는 등 크게 용맹을 떨쳤습니다.
그러던 중 친일 밀정의 농간으로 1932년 1월 중국 안동현에서 붙잡혀 신의주 경찰서로 인도되어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받은 후 1933년 3월 신의주지방법원, 1934년 1월 평양복심법원 등 일제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같은 해 5월 18일 평양형무소에서 형 집행으로 말미암아 30세의 한창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독립공원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와 사진을 8월 한 달 동안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입니다
<< 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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