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소식

국립3·15민주묘지 - 새소식 상세보기 - 제목, 내용, 파일 정보 제공
5월의 독립운동가 「한성수」 선생
◈ 학병출신으로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 제3지대 화남지역 책임자로 활약한 한성수(1920.8.18~1945.5.13) 선생 ◈ 국가보훈처(처장 朴維徹)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광복군 제3지대 화남지역 책임자로 활동한 한성수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습니다. 선생은 1920년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나 일본 전수대학 경제학과에 재학 중 독립운동 관련 서적을 읽다가 발각되어 정학을 맞기도 하는 등 투철한 민족의식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1944년 초 선생은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평양에서 기초훈련을 받은 뒤 중국 강소성 서주 인근의 일본군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4년 3월 일본군을 탈출하여 안휘성 부양의 한국광복군 제3지대로 갔다.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교육 훈련을 받고 광복군 장교로 임관한 뒤, 광복군 제3지대의 기간요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적 후방 공작을 펴며 광복군 대원 모집 활동을 벌여 많은 한국인 청년들을 광복군으로 만들었다. 1944년 11월에는 화남지역 공작책임자로 임명되어 상해 일본군내 젊은 한국국적 장병들과 한국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은밀하게 초모공작을 진행하여 10여 명의 한국인 청년들을 포섭, 공작거점을 확보하였다. 또한 상해의 한국인 갑부인 손창식을 찾아가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가 써준 메모를 건네면서 군자금 제공을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45년 3월 13일 동지들과 함께 상해 주둔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일본군을 탈출한 전력 때문에 잔혹한 고문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 군법회의 재판정에서 법정투쟁을 전개하여 광복군 장교와 대한 남아의 기개를 크게 떨쳤다. 결국 선생은 상해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고 1945년 5월 13일 참수형을 당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5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입니다.
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