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 에 대한 이형오님의 답변을보고 | |
"김주열"에 대한 이형오님의 답변을 보고 한말씀 드립니다.
1. "김주열 열사"라고 하였는되 "열사"라는 호칭은 누가 또는 어느 관청에서 부여한 호칭인지?
2. 보훈처직원(공무원)이신 이형오님도 아무 생각없이 "열사"라고 호칭을 사용하는 것인지?
3. 우리 선혈들에에 부처진 많은 호칭을(義士,烈士.志士,鬪士,將軍.등등)어느 기관에서든 검정하고 定立 하여야 하지 않을가 생각됩니다.
4. 김주열군은 당시 마산상고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입학을 앞둔 시점이라고 말씀하셨는되 그것은 사실입니다,(60년대에는 입학식이 4월이였지요)
입학을 앞둔시점이라면 마산상고 학생이 아니라는것입니다.입학수속(즉 등록금납부등)을 마치고 입학식을 한 후 라야 마산상고 학생이 아닌가요? 왜 입학도 하지아니한 대기상태의 학생을 마산상고 학생이라고 하며 마산상고에서는 교정에 흉상을 세운것도 무었인가 假裝된 것이 아닐가요? 만약 입학을 앞둔상태의 학생이 범법행위를 하였다면 누가 마산상고 학생이라고 하겠는지요?
김주열이가 누구인지 모르는 어린학생들에게 마산상고 학생이라고 어떻게 설명을 하실것인지요?
5. 마산상고 학생의 일원으로서 의거에 참가 하였다고 하셨는되.
김주열군이 행방불명된 3.15일 밤에는 4.19의거와 같이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의거(시위)를 하지 아니하였으며 시민들이 자유당의 3인조 5인조등의 부정선거를 부정하는 자발적인 의거(시위)가 일어난 것입니다 . 마산에서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의거(시위)한 것은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에서 발견된 후 4월12일 이후에 있었습니다.
6.당시 김주열군의 어머님 말씀이" 좌산동 김주열의 이모집에서 그날 저녁 구경하로 나갔다가 행방불명 되였다고 하였는되"( 여기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자료수집 및 사실규명을 해볼 예정임)
7. 김주열군을 열사라고 한다면 당시 죽음을 당한 13위와 부상으로 인하여 평생을 고생한 사람 전부가 열사가 되어야 하지 안는가요? 김주열이만 열사가 되어야할 이유라도 있는것인지? 김주열군에 대하여 너무 미화되고 가장된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글을 315의거 기념사업회에서나 마산산고(현 용마고등학교) 분들도 보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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