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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3·15민주묘지 - 참여게시판 상세보기 - 제목, 내용, 파일, URL 정보 제공
국립 3.15 묘지
국립 3·15 묘지 마흔 다섯 해 전 자유당 정권이 주도했던 3·15 부정선거를, 당시 야당이나 민초들의 진솔한 속내의 단적인 표현은 어땠을까. 물론 매우 다양한 견해를 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당시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 마산시 대책위원회’에서 시내 요소 요소에 벽보로 붙였던 ‘선거부인공고(選擧否認公告)’와 같이 참담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하기만 했던 자신을 한탄했을 법하다. 아래의 내용은 현재 ‘3·15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실제 벽보의 내용이다. 이 벽보는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세로 쓰기’로 쓴 붓글씨로서, 원본(原本)의 내용을 그대로 옮겼으며 오자(誤字) 또한 수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를 비롯하여 그 당시의 몇 몇 문건을 유심히 살펴보니, 거의가 모든 내용을 한자(漢字)로 표기하고 토씨 정도만 한글로 나타내는 특징을 보였다. 選擧否認公告 民主黨 馬山市 選擧對策委員會는 自由黨의 가진 不法과 無法으로 暗黑選擧를 恣行함으로 이 以上 公明選擧를 期待 할 수 없는 絶望的 事態에 處하였음에 三月 十五日 上午 十時 三十分을 期하여 萬不得기 選擧를 否認함을 慈에 嚴肅히 告함. 檀紀 四二九三年 三月 十五日 民主黨 正副統領 選擧 馬山市 對策委員會 ‘국립 3·15 묘지’는 자유당 정권이 장기집권을 도모하기 위한 음모를 숨긴 채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부정선거를 배격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희생당한 영령들이 영면에 드신 거룩한 묘역이다. 따라서 이 성지는 자유와 민주 그리고 정의를 사랑하는 마산의 시민정신을 계승하려고 조성한 성역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최초에 묘역은 1967년에 현재의 위치인 ‘경남 마산시 구암1동 544-1번지’에 초라하게 조성되었었다. 그 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2002년 ‘국립 3·15 묘지(대통령령 제17668호)’로 승격되었고, 2003년 봄에 사만 삼천 여 평(坪)의 묘역이 완공되었다. 이 묘역은 남해고속도로 마산 나들목(IC) 부근의 하이트 맥주 공장 뒤편 산비탈에 위치하여, 외지인들도 눈여겨본다면 고속도로를 지나며 쉬 찾을 수 있다. 국립묘지라고 해도 전체적으로 급한 산비탈을 따라서 아래에서부터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시설을 배치한 형태로서, 크게 여섯 부분으로 구분하면 좋을 성싶었다. 먼저 외부에서 묘역으로 진입하면 주차장과 쉼터가 가장 낮은 쪽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는 널따란 주차장과 번듯한 휴게소가 자리잡고 있다. 두 번째로 ‘민주의 탑’에 이르는 길이다. 이 묘역에 이르러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세 개의 부분으로 구분된 하얀 대리석 계단을 따라 숨을 몰아쉬며 오르면 작은 광장의 중앙에 ‘민주의 탑’과 그 왼쪽에 ‘정의의 상’이 반긴다. 이 ‘민주의 탑’은 17미터(m) 높이에 세 개의 벽(壁) 같이 생긴 기둥 모양의 조형물이 하늘을 향하여 치솟아 있는데, 앞면은 하얀 대리석을 붙였고, 뒷면은 거울 같이 물체가 투명하게 비춰지는 재료를 붙여 만들었다. 그리고 ‘민주의 탑’에서 약간 왼쪽으로 비껴선 ‘정의의 상’은 3미터 정도의 높이에 두꺼운 청동 판(板)을 뚫고 나오는 듯한 세 젊은이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들에 담겨있는 뜻을 이렇게 오석(烏石)에 새기고 있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첫 문을 연 3·15 의거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불의와 부정에 항거하여 자유와 민주를 쟁취한 정의의 표상이며 개방과 소통, 날로 발전하는 민족의 밝은 미래를 상징한다.” 세 번째로 ‘정의의 벽’이 있는 ‘다목적 광장’에 이르는 길이다. ‘민주의 탑’이 있는 광장에서 다시 직선 형태의 두 개의 부분으로 만든 계단과 하나의 원형 계단을 더 오르면 ‘다목적 광장’이 나온다. 이 광장 중앙에는 향로와 향합으로 이루어진 ‘참배단(參拜壇)’이 있고, 그 뒤쪽에는 병풍을 펼쳐 놓은 듯이 하얀 대리석에 포효하는 군중의 모습을 새긴 부조물(浮彫物)인 ‘정의의 벽’이 자리했다. 그리고 그 벽의 왼쪽과 오른쪽 끝 부분에는 각각 세 개의 횃불이 타오르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 부조물을 이름하여 ‘민주의 횃불’이라고 호칭했다. 이 ‘다목적 광장’에 설치된 상징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었다. “이 땅에 정의를 세운 그 날의 애국·희생정신과 저항·투쟁의 현장을 부각시킨 역사의 장으로 그 넋과 의로움을 밝히는 민주의 횃불과 함께 3·15 정신을 계승, 승화시키는 영원성의 공간이다.” 네 번째로 영령들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전통적인 한옥형태의 ‘유영봉안소(遺影奉安所)’에 이르는 길이다. ‘정의의 벽’ 오른쪽으로 만들어진 비탈길로 들어섰다가, 다시 열 개의 부분으로 구분하여 만들어진 계단을 엉금엉금 기어오르면, 이 묘지의 가장 높은 곳에 ‘유영봉안소’가 우뚝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열 개의 부분으로 만든 직선 형태의 대리석 계단 왼쪽과 오른쪽에는 좌우대칭 균형을 맞춰서 각각 네 개의 단계로 묘지가 조성되어 모두 80기를 모실 수 있게 되어있었다. 조심스럽게 봉안소 내부로 들어섰더니 ‘김주열’ 열사를 비롯한 26위의 영정 대부분이 10대의 어린 모습으로서,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간 꽃이라 생각하니 아득할 뿐 머릿속은 깜깜해졌다. 이 봉안소 건물은 남향으로 마산 시내를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는 명당에 터를 잡고 있어 영령들에게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다섯 번째로 ‘3·15 기념관’에는 의거에 관련되는 각종 선거 자료와 당시의 보도된 내용과 사진, 영령들의 유품과 재판 기록, 영상매체를 이용한 입체적인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기념 시비(詩碑)’ 동산에는 ‘김춘수’시인의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을 비롯하여 열 사람의 작품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후손들도 두 사람의 작품을 추가로 새길 수 있도록 빈자리를 남겨두는 넉넉함도 엿보였다. 흔히들 지역적인 기질을 얘기하던가. 그런 면에서 본다면 마산은 충절의 관향(貫鄕)이다. 근대와 현대를 보더라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위대한 충절의 혼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지난 임진년 5월 ‘합포 해전’, 선조 때 ‘안골포 해전’이나 ‘의병장 최강의 안민고개 전투’ 같은 승전의 역사가 있었다. 그런가하면 ‘삼진의거(三鎭義擧)’는 경기도 수원의 ‘제암리사건(堤岩里事件)’, 황해도의 ‘수안의거(遂安義擧)’, 평안도의 ‘선천읍의거(宣川邑義擧)’와 함께 ‘기미년 4대 의거(己未年 四大義擧)’로 3·1 운동의 기념비적인 의거이기도 했다. 이렇게 면면히 이어진 곧은 충절은 부정 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단호하게 척결하기 위하여 3·15 의거의 횃불을 높이 들어 온 나라와 백성들을 일깨움으로써 결국은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우국충정의 불꽃은 ‘10·18 부마항쟁(釜馬抗爭)’으로 이어져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몰락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이 땅에서 군사독재를 몰아내며 도도한 역사의 심판자 역할을 해왔다. 사회학에 대하여 까막눈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은 채 ‘국립 3·15 묘지’를 둘러보면서 오지랖 넓게 이런 생각을 해봤다. 역사는 시대적 상황 논리에 따라 많은 이해집단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나 충돌 그리고 갈등이나 치열한 투쟁과 시련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가 용서하고 와해(瓦解)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에 따라 또 다른 집단으로 융화하는 게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암울한 군사 독재정권 시절을 살아오면서 ‘3·15 정신’을 제대로 계승 발전시키지 못했고 흐름이 왜곡되었었다. 따라서 ‘3·15 의거’의 숭고한 정신의 뿌리였던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순리가 상식이 되는 사회를 이룩하는 것은 우리의 책무임에 틀림없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정의와 진실이 통용되는 열린사회를 지향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고 실천 방안의 모색이 중대한 과제가 아닐까. 월간 문학저널 2005년 9월호 제4권 제9호 통권27호(권말작품집) 2005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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