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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용사들의 오늘 -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쳐

[6·25 참전용사들의 오늘] [1] 19만7056명 첫 全數조사
“젊은사람들 내 뒤에서 ‘얼마나 죽였길래’ 수군수군 이젠 훈장 안 달고 다녀…세상이 야속하고 나 스스로 비참할 뿐”
월평균 소득 37만116원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쳐

6·25전쟁 때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최득수(83)씨는 이젠 더 이상 훈장을 달고 다니지 않는다.

지난 18일 6·25 전쟁 때 충무무공훈장을 받은 전인호(78)씨가 밥상도 없이 바닥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전씨가 2평(6.6㎡)이 채 안 되는 단칸방에서 저녁으로 먹은 것은 밥 한 공기와 깍두기가 전부였다. /오진규 인턴기자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 하순, 강원도 양구 비석고지전투에서 3중의 적 기관총 진지를 박살 내 고지탈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공(戰功)을 인정받은 훈장이었다. 태극무공훈장은 5등급의 무공훈장 중에서 최고 훈장이다. 6·25전쟁 기간 중 이 훈장을 받은 군인은 장군 등을 통틀어 60여명에 불과하다. 최씨는 "2~3년 전 한 행사장에 갔다가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으면 저런 훈장을 받았겠느냐'고 수군거리는 걸 들었다"며 "그 뒤로는 평소엔 훈장을 달고 다니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전쟁이 60년 전 일이라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희생은 인정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6·25전쟁에 참전한 군인은 당시 남한 남자의 10분의 1이 넘는 100만~130만명(추정)에 달했다. 이 중 62만1479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지난 60년간 한국은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뤄냈다. 현재의 우리 모습은 전쟁 때 이 나라를 지켜낸 참전용사들의 피와 희생이 밑거름이 됐다. 선진국 문턱에 왔을 만큼 부유해진 지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그들은 어떤 모습일까.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보훈교육연구원이 전체 6·25 참전용사 중 19만7056명에 대해 사상 첫 전수조사를 한 결과, 이들의 월평균 총소득은 37만116원에 불과했다. 올해 1인가구 최저생계비 50만4344원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형시영 연구팀장은 "소득엔 근로·사업소득과 연금·참전수당·노령연금 등이 모두 포함된 것"이라며 "참전유공자들의 저소득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지난 5월 말 현재 생존해 있는 전체 참전용사는 23만5037명이다. 최근 4년간 매년 평균 1만4000여명의 참전용사가 세상을 떠났다.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과 홀대 속에 나라를 지킨 '영웅'들은 하나둘씩 쓸쓸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전쟁 때 무공훈장 3개(충무 1개, 화랑 2개)를 받은 이행옥(81)씨는 요즘 열쇠가게 광고 스티커를 붙이는 일을 한다. 하루 8시간 서울 강남 일대 상가나 아파트 단지를 돌며 스티커 1000장을 붙이면 일당 3만원이 손에 쥐어진다. 그전엔 피자·치킨 등 광고전단·스티커 돌리는 일도 했다. 이렇게 한 달에 버는 돈은 30여만원. 다리가 붓고 아파 매일 일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가게 주인이나 아파트 주민들이 '왜 남의 집에 함부로 스티커를 붙이느냐'고 쏴붙이는 경우가 많다"며 "그럴 땐 세상이 야속하기도 하고 나 자신이 한없이 비참해진다"고 말했다.

이씨는 작년까지 국가로부터 '무공영예수당' 14만원(2009년 기준)을 받았다. 전쟁 때 왼쪽 팔에 총을 맞았지만 전상(戰傷) 신청을 하진 않았다. "명예롭게 전쟁에 참가해 부상을 당한 걸 갖고 국가 돈을 타 먹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작년 말 상이군경 신청을 했고, 7급 판정을 받았다. 상이로 42만여원을 받게 되자, 이번엔 무공영예수당 지급이 중단됐다. 보훈급여와 무공영예수당 중 하나만 받게 돼 있는 제도 때문이다. 이씨는 "전쟁 때 용감하게 싸웠다고 국가가 준 3개의 무공훈장은 과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인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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