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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호로자식이 아니야


저자는 1949년 공업도시 울산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경찰관이었던 고 유귀룡 경위와 원옥잠여사와의 사이에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선친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한 해전 초봄, 저자가 어머니 뱃속에서 1개월도 채 안된 27세의 젊은 나이로 북한군 소속 빨치산과 교전 중 장렬히 순국하셨고, 어머니마저 저자 나이 세살 때 돌아가셨다. 그후 저자는 오로지 할머니 슬하에서 울산초등학교, 울산제일중학교, 부산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학으로 44살때 명지전문대학교를 졸업했다.

저자가 22세 되던 그해 봄, 동향의 이순필처녀와 혼인하여 네 딸을 두었다. 저자는 울산시 지방공무원으로서 15년동안 근무한 후, 국가보훈처 산하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서 정년퇴직한 후에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에 근무한바 있다.

한편, 저자는 1994년, 6?25발발 44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남과 북이 핵문제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을때 전쟁반대를 외치면서 부부가 함께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파주 임진각까지 휴전선 155마일을 도보로 횡단한후 지금까지 18년간 79회, 38선을 횡단하고 있어 주위에서는 이들부부를 38선맨으로 부르고있다. 더욱이 지난 200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욕~워싱턴~덴버~ 샌프란시스코~LA까지 13개주,4,000km를 현지에서 차를 렌트하여 북미대륙38선을 사상 처음으로 달리면서 조국의 평화를 만방에 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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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머리글>

동서고금(東西古今)에 걸쳐 비참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첫째, 늙은 홀아비, 둘째, 늙은 홀어미, 셋째, 부모 없는 아이, 넷째, 자식 없는 늙은이 등으로 바로 사궁(四窮)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네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거치지 않고 태어나 다복하게 살아가지만, 할머니와 나는 처음부터 인생의 멍에를 등에 지고 허우적대며 시작해야 했다. 그것은 분명 할머니와 나의 숙명적이고도 비극적인 시작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였다.
『논어』 「학이편(學而編)」에는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에는 그 뜻을 살펴야 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 발자취를 살펴야 하니, 3년 동안은 아버지가 행하신 일들을 고치지 않아야 비로소 효자라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나를 낳아 주신 아버지의 얼굴도 본 적이 없고, 그 넓은 가슴에 한 번 안겨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도 없고, 그 목소리를 들어본 일도 없다.
그처럼 아버지의 존재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는 전혀 손길이 닿지 않는 저 먼 세계로 인식되었다. 아버지를 그리워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그저 무지개를 따려고 헛손질을 해대는 식이 될 뿐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만 일 개월도 채 안 된 때, 그리고 어머니 스스로도 임신한 사실조차 아직 몰랐던 그때, 청년 경찰 간부이시던 아버지는 나라와 겨레를 위해 순국하셨다.
나는 바로 유복자(遺腹子), 삼대독자, 대한민국 6?25 전몰군경 유자녀(遺子女),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저 비극의 호로자식이 되고만 것이다.
어릴 때의 이런저런 일들이 새삼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어느 해 한여름 깊은 밤이었다. 마당 한가운데 모닥불에서는 모기와 하루살이를 쫓기 위해 옥수수 껍질을 태운 흰 연기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거리고, 파란 모기장 안에서는 어느새 들어왔는지 모기 두 마리가 앵앵거리며 잠이 막 들려는 어린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어린 내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하신 할머니는 부채를 흔드시고 과일을 드시면서 평상에 앉아 동네 아낙네 서너 명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하지만, 아직 잠이 들지 못한 채 뒤척이고 있던 나는 뜻밖의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할머니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지만 할머니의 입을 통해 내 귀에 꽂히는 이야기들 하나하나는 내게는 실로 비수와도 같았다. 바로 내 집안 이야기였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조상님들의 지난 삶에 대한 슬픈 사연들이었다.
그래도 나는 다행히 동심이라는 깊은 호수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날 밤의 할머니 이야기들을 그저 잠결에 흘려들은 정도로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이내 단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로 시간이 흐르면서 그날 밤 할머니의 이야기는 한 줄기 섬광이 되어 내 머릿속을 마구 휘젓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깊게 새겨지더니, 나중에는 나를 초겨울 강가로 끌고나가 흐느껴 울게 만들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강둑에 홀로 웅크린 채 흐느껴 우는 일이 늘어만 갔다.
할머니는 어린 손자가 아버지 없는 처지를 너무 깊이 생각할까 봐서 일부러 나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를 되도록 삼가셨던 것 같다. 하지만, 차츰 나이가 들면서 6.25전쟁을 전후한 나라 형편을 하나씩 이해하게 되고, 그런 속에서 자연스레 나 자신에 얽힌 이런저런 사실들에 대한 관심도 커지게 되었다.
1949년 봄은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 발발을 한 해 앞둔 시기였다. 나라 안은 좌익과 우익의 사상싸움으로 그 어느 해보다도 살벌했다. 국내 치안도 극도로 어지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아버지는 대한민국 건국의 경찰로서 경상북도경찰국 경주경찰서 안강지서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 해 3월 23일, 미명의 시각. 경상북도 경주군 안강읍(安康邑) 두류리, 인적이 드문 산골의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일어났던 그 비극적인 전투.경찰관 3명과 북한 인민군 소속 빨치산 부대원 20명과의 교전. 너무나 운명적인 두류리전투!
아버지는 바로 그 전투에서 동료경찰 두 명과 함께 조국의 수호신으로 장렬히 순국하셨다. 당시 27세의 유귀룡(劉貴龍) 경위.
아! 하늘도 땅도 무심하여라. 나는 그해 늦가을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나에 대한 그런 비극적인 지난 사실들을 모두 알게 되었을 때 나의 가슴 속에는 잠재울 수 없는 격랑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 뒤로 아버지에 대한 나의 되새김질은 그리움을 넘어 내 성장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나는 성장하면서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하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무한한 자긍심과 존경심으로 바꿔갈 수 있었다. 선친에 대한 그리움이 쌓이고 쌓일수록 선친의 자랑스러운 발자취에 대한 엄숙한 마음가짐 또한 자연히 웃자라기 시작했다.
나는 전형적인 자수성가(自手成家)의 길을 걸어야 했다. 숱한 역경을 할머니와 가족들이 함께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선친의 발자취는 내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선친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빛바랜 사진 속에서 풀어가고 이어가며 소란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버릇은 일종의 경건한 의식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내가 빛바랜 사진 속에 오래 머물수록 나와 아버지와의 끈끈한 연결고리는 더욱더 강해져만 갔다.
‘아버지! 아버지! 나의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저를 힘껏 껴안아 주세요.’
그렇게 입속에서 되뇌다 보면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신앙심 같은 어떤 강한 힘이 나를 감싸기도 한다. 아마도 세상에 남기신 한 점 혈육에 대한 아버지의 특별한 뜻이 훈계로 나타나기도 하고 희망의 등불로도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점 혈육에 대한 그 간절하고 그윽한 생각이 왜 이승 저승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지 못하겠는가! 나는 늘 그런 식으로 어두운 망망대해(茫茫大海) 한가운데서 온 바다를 환하게 밝히는 높은 등대를 발견하곤 한다. 길을 잃고 표류하는 난파선의 처지에서 조차도 나는 그 고마운 등대 덕분에 언제든 안전한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나와 아버지 사이의 그 숨바꼭질 같은 연결고리 찾기는 그처럼 언제나 희망의 길, 안정의 길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힘들수록 더 밝게 비추고 어려울수록 더 또렷하게 드러나는 신비스러운 불빛이었다.
한 가정에 아버지가 없는 것은 대문이 없는 것과 같고, 어머니가 없는 것은 방문이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일가친척이 없는 것은 울타리가 없는 것과 같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대문과 울타리가 없었다. 세 살 때는 방문마저 잃어버린 채 쓰디쓴 비운을 그 누구보다도 일찍 겪으며 자라야 했다. 그래서 할머니와 어린 나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억센 바람을 막아내야 하는 힘겨운 인생길의 연속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십대 초반에 가정을 꾸림으로써 방황하던 나의 인생항로에 자그마하지만 튼튼한 닻을 내릴 수 있었다. 작지만 소중한 안정이고 어설프지만 한없이 고마운 행복이었다. 나는 부모님이 다하지 못한 그 대문과 방문의 역할을 내자와 함께 이루어 내는 것이 ? 부모님께 대한 작은 도리요, 내게 맡겨진 성스러운 소임이라고 확신했다.
2012년 올해는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발발한지 어느덧 62년이 되는 해이다.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국제연합(UN)의 결의에 따라 낯선 땅에서 피 흘려 싸워준 고마운 젊은 병사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군 적군을 분별하기조차 어려운 낯선 전장에서 평화의 이름으로 산화한 젊은 혼들을 생각하며 남은 자들의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피 흘려 싸워준 그 분들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번영과 평화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한반도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정의가 살아 숨 쉬게 하려는 숭고한 투혼들이었다. 그들이 흘린 그 고귀한 피와 희생정신을 우리는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 안타깝게도 그 참혹한 전쟁이 끝난 지 5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강토에는 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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