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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용사들의 오늘 - 가시밭 인생

참전유공자 명예수당, 본인 사망 뒤에는 안나와

참전유공자들은 전쟁을 이겨내고 나서도 세상의 풍파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는 동안 그들 옆을 지켰던 아내와 가족들의 고통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울 중계동 영구임대아파트에 홀로 사는 김입분(76)씨 남편은 1949년 입대해 1957년까지 복무한 참전용사였다. 전쟁 때 해병대에서 활약한 그는 화랑무공훈장 2개를 받은 용감한 군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역한 지 두 달 만에 폐결핵으로 쓰러져 40년 동안 병을 앓았다. 가장이 몸져누워 아무 일도 할 수 없자 김씨는 밤낮으로 파출부 생활을 하며 남편과 세 딸을 부양해야 했다. 김씨 남편은 1997년 사망했다. 김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일당 2만원을 받으며 파출부 일을 나갔다. 매일 나가던 일은 골다공증으로 다리가 아파 일주일에 3번으로 줄었다. 김씨는 "남편이 무공훈장을 받은 덕에 생활수당을 월 19만원씩 받고 있지만 20만원이 넘는 아파트 임대료를 내기 위해서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서울 월계동에 사는 김종희(85)씨 남편은 1952년 소위로 임관해 1956년 대위로 제대한 참전용사였다. 전쟁 때 전공(戰功)을 세운 김씨의 남편은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무학(無學)의 김씨는 "두 아들만큼은 마음껏 배우게 하고 싶어 남편과 함께 공사현장에서 죽도록 일했다"고 했다. 그러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두 아들은 중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이 됐다. 김씨 남편은 1991년 세상을 떠났고 김씨는 공사현장에서 일한 후유증으로 골병이 들어 거동할 수 없게 됐다. 김씨는 "훈장을 받아서 어디에 쓸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김씨는 33㎡(11평)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다.

남편이 단순 참전유공자인 경우 아내와 가족의 삶은 더욱 열악하다. 국가유공자예우법에 따라 상이 유공자와 무공훈장 수훈자의 가족은 생활수당을 받지만 참전유공자의 가족은 이런 혜택조차 받을 수 없다.

서울 자양동에 사는 박삼례(77)씨는 3년 전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다. 박씨의 남편은 1949년 입대해 1958년 소위로 제대한 참전유공자였다. 전쟁 중 박씨 남편은 미국 정부로부터 동성훈장을 받아 2계급을 특진하기도 했다. 제대 후 박씨 남편은 원호청(현 국가보훈처)에서 수위로 일했지만 5남매를 키우기엔 벅찼다. 이에 박씨도 시장에 나가 과일과 아이스크림을 팔아 생계를 도왔다. 박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복지관에서 점심 배식을 돕고 있다. 박씨는 "점심값이 2000원인데 배식을 하면 공짜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2002년부터 국가보훈처는 참전유공자들에게 참전명예수당을 지급하고 있지만 유공자 본인이 생존해 있을 때만 혜택을 준다. 2007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박씨는 국가로부터 참전명예수당을 더는 받고 있지 않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 받은 수당은 7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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