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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영전에
#1 준비 며칠동안 물처럼 조용했던 마음에 물결이 일었습니다. 왠지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뭔지 모를 불안감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 불안감의 실체가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늘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준비도 되지 않았는 데 벌써 마지막이라는 말로 갑자기 다가 왔습니다.평생 호강다운 호강도 시켜드리지 못했는 데 이제 떠나려 합니다. 아이는 부모의 자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언제나 잘나지는 못한 아이 였습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떠나 보내 드려야할 시간이 눈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난 준비도 되지 않은 허연 머리의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가위에 눌려서 "죽기 싫다"고 하셨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내 시간을 잘라서 나누어 드릴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남들처럼 내 부친을 그렇게 사랑한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끝없는 연민이 드는 까닭은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가시는 길 ... 고통이라도 덜어 드릴 수 있었으면 ... #2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 "또 하루가 지난다. 이 날 여태껏 살아온 것이 후회 스럽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하다. 과연 뭐가 뭔지 알 수가 있으면 좋으련만 정신과 육체의 완전한 지주가 있으면 좋으련 무엇이 있어 우리를 이날까지 존재하게 하는가? 무엇이 있어 나를 오늘까지 존재하게 하는가?" 한 열흘 지났나 보다. 뭘 하며 지내는 지 모르겠다. 오월도 벌써 며칠 지났고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도 마냥 유혹이다 현관 전등 아래 지은 제비집도 제법 집답게 보인다. 문설주 지나서 작은 방과 큰 방 사이로 봄 기운이 흩날린다 바쁘겠지만 연락해라. 83/5/4 " 아버지의 병문안 갔다가 "최재식에게 조우회 모임 참석하지 못한다고 연락하라"는 말씀을 듣고 아버지의 노트를 들쩍거려 보다가 그 중 한 노트에서 스무해도 더 지난 나의 글씨가 발견되었다. 아들의 글씨가 담긴 것을 버리기가 아까우셨는 지 원체 검소 하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중요사항을 기록한 그 곳에서 옛날의 나를 보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힘든 것은 마찬 가지였나보다 너무 큰 수술이어서 그런지 약간의 치매기도 보인다. 어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 맑은 정신으로 당신의 상태를 물어 본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아버지 이제 얼마 남지 않으셨으니 정리하세요"라고 말할까? "아버지 별 것 아니지만 연세가 드셔서 회복이 늦어 진답니다"라고 말할까?" #3 수술 수술 후 이틀은 깨어 있다가 수술 후유증으로 점차 상태가 나빠져 ... 헛소리, 포악성, ... 섬망 현상이라고 부르는 치매 비슷한 증상인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진정제를 투여했다 진정제 투여 후 팔다리에는 링거를 꽃고 배에는 변주머니를 달고 뒤척임도 없었다면 죽음과도 같은 혼수를 열흘이나 보내고서야 오늘 아침 의식이 아주 조금 돌아오신 것 같다. 가족들의 얼굴들을 알아보는 듯 마는 듯 ... 마음이 많이 불편하다 #4 인생유전 당신이 와병에 드신지 벌써 두달이 지났다. 덥수룩한 수염이며 힘없는 눈망울이며 살이 다 빠져버려 뼈만 앙상한 수족을 보고 있노라니 참 힘든 생을 살아 오셨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물정 모르는 여섯살의 어린 나이로 고향을 등지는 일이 부끄러워 야반도주 하시는 할아버님의 손에 이끌려 처녀 뱃사공의 노래의 원류인 남강 지류 이모리 나루터를 넘어와 부산에 정착한 지가 벌써 칠십여 성상이 지났다. 할아버지도 오랫동안 자식을 보살펴 주시지 못하고 먼저 가셨고, 큰 아버님은 계셨지만 결혼을 하지 않아 가장의 역할에, 종손의 역할까지 도 맡아하면서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어 술을 과하게 드시는 날이면 우리를 무던히도 괴롭혀 그 때는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무서운 생각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60년대 마흔이 조금 넘은 나이로 그 유명했던 조선공사의 목형공장 공장장을 하시다가 열악한 근로 조건을 위해 노조 설립을 하시고 그 책임으로 권고 사직을 당한 이후로 별 다른 직장도 구하지 못한채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시며 다섯 자녀를 대학까지 보낸다고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 ... 할머님은 여던 여섯에 돌아가셨으니 그 때는 모두 호상이었다라고 할 정도 였지만 성혼도 하지 못한채 간경화로 돌아가신 형님과, 재혼한 제수씨가 집 나가버려 급기야 알콜 중독으로 죽어간 동생을 보면서 과연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아버님 당신의 시대가 대부분 다 그러했겠지만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녀온 기억이 별로 없는 것을 생각해보면 산다기 보다는 그저 하루를 탈 없이 넘기는 것이 당신의 삶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참 서럽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무섭고, 뜻을 펼칠 곳이 없어 평생 맘고생만 하시다 삶다운 삶을 누리지도 못했는 데 벌써 정리할 시간이 다가온다. 이제 내 나이 오십 ...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특별한 희망도 없고, 욕심도 없고 그저 일용할 양식 걱정에 당신의 뒤를 밟아가는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마흔 조금 넘은 나이로 직장을 그만 두고 똑같은 구멍가게로 그저 하루, 하루를 넘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참으로 인생유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 5 길은 멀고 문듯 전화소리에 잠을 깨었다.엄마의 전화다. "인자 일났나. 시간되면 이리 오이라" 병원에서 아버지의 얼마남지 않는 삶을 지켜보고 계시는 엄마의 목소리다. 몇초가 걸린후에 "어제 막내와 잠시 다툰 것 때문에 그러나? 하고 "응 알았다"라고 대답했다. 어제 막내가 생이 얼마남지 않은 아버지에게 짜증을 내었다고 해서 전화로 타이른다고 한 것이 잠시 다툼으로 이어졌다. 직장이 없다는 이유로, 가깝게 있다는 이유로, 혼자서 두달이 넘도록 매일같이 아버지 병수발을 든다고 힘들었는 데 타 이른다고 전화한 내가 못내 섭섭했던 모양이다. 세수하고 주섬주섬 옷을 갈아 입는데 뭔가가 생각이 난다. 보통 꿈을 기억하지는 못해서 "대인은 무몽"이라는 말을 믿고있는 데 오늘은 아련하고 그립고 아름다운 것 같은 뭔가가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 차를 몰고 가는 길에 내내 생각하다가 도착할 때 즈음 되어서 어릴 때 만화의 기억이 꿈으로 나타났던 것을 기억해 내었다. 작가가 누구인지, 제목이 뭔지 기억 나지는 않지만 아주 서정적인 촌 동네 그림이며, 키 큰 미류나무이며, 끝이 없을 것 같이 뻗어 있는 작은 길 ... 그 길을 문둥병에 걸린 주인공이 이리저리 다니면서 본 것과 느낀 것을 얘기하는 내용인 데 그 중의 한 구절이 머릿속에 박혀 있다가 꿈으로 나타난 모양이다. "길은 아직도 먼 데 오늘도 발가락 하나가 또 떨어져 나갔구나" 라는 그 한구절이 삼십년의 세월을 건너 오늘 내 마음속에서 되살아 난 것이다. 요즘의 상황이 그래서 인지 그 옛날 잊혀져버려도 오래전에 잊혀졌어야 할 기억이 이제야 나타난 것인 모양이다. #6 새로운 시작 정해년 오월 열엿새 오전 열한시 사십팔분 마지막 숨을 놓으셨다. 한시간쭘 걸리는 가게로 오기전 볼 때만 하더라도 마지막 한줌 숨은 쥐고 계셨는 데 가게에 도착하자말자 숨을 놓으셨다는 전갈을 주셨다. "아버지 내일 또 오께요"란 말이 살아 생전 마지막 말이 되어 버렸다. 숨을 놓는 마지막 모습이 흉해서인지 , 초라해진 당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인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숨을 놓으셨다. 한 줌의 숨으로도 더 오랫동안 걱정과 근심을 키울까봐, 숨을 쥐고 있을 동안 커져만가는 자식의 근심과 회환을 더 이상 커지기 전에 종기 짜내듯 터뜨려 버리셨다. 구름이 낮게 깔리더니만 비가 내린다. 회한의 덩어리를 씻어 버리는 듯이 쏟아진다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향한 첫 걸음을 떼셨다. # 7 외삼촌의 추념사 자형의 영전에 올립니다. 자형, 큰 자형!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태연하게 안겨주시고 자형은 이토록 조용하시답디까? 오늘 저희들은 자형의 영전에 모여 가슴 아픈 이별의 예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대저 인명의 수요장단은 하늘의 뜻이요, 죽음은 혼자가는 외로운 길이라 하오나 자형의 가심이 너무도 가슴아프고 안타까워 이렇게 눈물울 흘리고 있습니다. 아아 슬프도다. 어쩌다 악질에 걸려 천수를 못다하였으나 자형의 굳은 의지나 평소의 건강으로 미루어 틀림없이 재기하실줄 알았더니 오호라 하늘의 무심함 이어라 이는 필시 하늘의 일꾼이 없어 빨리 데려 가셨거나 이태백이나 도연명과 같은 주당들이 필시 외로워 재촉해 불러가신 것이 틀림없음을 알겠나이다. 지난 3월 14 일 입원해 계시던 병원을 찾았을 때 비록 정신은 희미했으나 빨리 일어나 태종대에 가서 장구치고 놀자고 이 처남이 말했을 때 파안 대소하던 자형이 꼭 회복되시리라 여겼는 데 오늘 당신의 영전에서 이렇게 한줄 글로써 이별을 서러워 하다니 오호 통재라 자형은 저 산수 맑은 충효의 고장 의령 땅을 고향을 삼아 일찍 동란의 위기에도 참전하셨고 또한 조선입국의 대열에 서서 웅지를 펼쳐 보리라 하셨으나 시세 불우하여 일찍 은둔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오나 천자가 인자하시고 의지가 깊었던 자형은 시세를 읽는 명석한 지식으로 이웃으로부터도 인정을 받는 지도자로서의 일생을 살아 오셨습니다 1955년 을미년 겨울에 박해근 여사를 배필로 맞아 50년을 넘게 살아오시면서 항상 큰 어른으로 저희를 지켜봐 주셨습니다. 제 나이 네살 되던 겨울 저희 집안으로 출입하셨던 그 때가 바로 엊그제 같사온 데 이제 영전에서 옛날을 회상하게 되리라고는 미쳐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고 좀더 저희들의 일을 봐주셔야 할 때에 세상을 버리심은 무슨 심사 입니까? 하오나 영령이시여 이미 다섯 조카들이 모두 성장하여 모두 가정을 이루었고 사회의 동량으로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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