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호국원갤러리

  • 알림마당
  • 호국원갤러리
  • 호국원갤러리
국립영천호국원 - 호국원갤러리 상세보기 - 제목, 내용, 파일, URL 정보 제공
백마고지전투관련자료-2
1. 1953년 7월 26일 휴전 16시간전 적지를 향해
2. 105mm 곡사포탄
3. 철원읍 관전리에 있는 노동당사는 공산치하에서 지역 주민들의
강제모금과 노동력 동원으로 지어진 지상 3층,
무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당시 그들은 이 당사를 건축하기 위하여
백미 200가마와 인력 그리고 각종 장비를 동원하여
1946년초에 시공 그 해 말에 완공된 560평의 소련식 건물이다.
당시 공산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은 이곳
노동당사에 잡혀와서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였다.
당사 뒷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현재도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되어 그 때의 참상을 알수있다. 저 뒤로 백마고지가 보인다.
4. 1952년 임진강을 도하하기 위해 고무다리를 놓아주는 공병대
5.자료기증 : 당시 참전하셨던 화랑무공훈장 수훈자 "김상우님"

백마고지 전투에 대하여

6·25전쟁중 1952년 10월 6일 저녁부터 10월 15일 오전까지 강원도 철원 서북방

395고지(백마고지)에서 전개된 전투.


강원도 철원의 휴전선 안쪽에 위치한 "백마고지"는해발 395m의 작은 산등성이에

불과하지만 철원평야를 통제하는 요충지로써 한국전쟁중 가장 치열한 접전을

치룬 곳이다.10월15일 결국 우리 국군이 쟁취하여 승리를 장식하고 백마고지로

명명하였다.포탄이 30만발 이상 퍼 부어져 산등성이의 높이가 1m정도 낮아졌으며

황폐된 산의 능선이 백마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백마고지라 이름을 붙였다 한다.

의정부→동두천→연천→신탄리역을 지나면 나온다.백마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로

중국인민지원군과 국군간의 치열한 공방이 전개되었다. 공격을 감행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장융후이[江擁輝]가 지휘하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에

지원부대병력을 합하여 총병력 4만 4,056명이었으며, 각종포 55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는 국군은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

병력 2만명에 국군 제51·52·53포병대대, 국군 제53전차중대, 미군 제213자주포병대대,

미군 제955중포병대대, 미군 제73전차대대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9일 동안 12차례에 걸쳐 치러진 공방전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은 약 1만 명,

국군은 3,500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에서 국군의 승리의 요인은

우수한 정보활동과 보병과 포병 간의 적절한 협동,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교대를

통한 충분한 휴식에 있었다. 기간의 지역 전투로서는 전쟁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였으며 중부 전선에서 한국군이 당하고 있던 수세 일변도를 뒤집어 놓은 전투였다.

백마고지 전투에서의 승리로 한국군의 전투능력과 지휘관의 지휘능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백마고지 사수를 위해 육탄돌격등 용감하게 싸우다 산화한

육군 제 9사단 장병등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에

전적기념관과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국가를 위해 산화하신 호국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파일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