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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과정

전개과정
4.19혁명전개과정을 안내합니다.

대구2.28학생의거

대구2.28학생의거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개최될 민주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등교시켜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에 동원하자 대구지역 고교생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2·28대구학생의거는 불의와 부정선거에 대한 최초의 항거로 4·19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3.15부정선거

3.15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 마침내 정·부통령 선거 날이 밝았다.
이 날은 장기집권을 꿈꾸는 이승만과 그의 갑작스런 유고시 뒤를 이을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예정된 승리의 날이었다.
3·15선거는 사상유례 없는 다음과 같은 추악하고 불법적인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1. 세 사람 또는 다섯 사람씩 짝지어 기표하고 자유당원에게 검사 받는 3인조, 5인조 공개 투표
  2. 투표소 주변에 자유당 완장부대를 동원해 민주당 지지자에게 위협을 주는 완장부대 등장
  3. 있지도 않은 사람을 유권자로 둔갑시켜 자유당에 투표하게 하는 유령유권자 조작
  4. 총 유권자의 40%에 달하는 자유당 표를 미리 투표함에 넣어두는 4할 사전투표 등 부정과 폭력이 난무했다.

마산3.15의거

마산3.15의거

민주당 마산지부의 선거무효 선언과 함께 시작된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이승만 정부는 무차별 진압에 나섰고 마산에서는 경찰의 사격으로 학생과 시민이 쓰러졌다.
무고한 시민, 학생의 죽음을 공산당의 책동으로 무마하려고 애쓰던 이 무렵, 마산시 중앙부두 앞바다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소년의 시체 한 구가 떠올랐다. 3월 15일 부정선거 항의시위에 참가했던 김주열군이 실종 20여일 만에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분노한 마산시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진실규명은 외면한 채 무고한 시민들을 연행·검거하였고, 이에 자유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