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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식

국립4·19민주묘지 - 새소식 상세보기 - 제목, 내용, 파일 정보 제공
신군부에 맞선 4·19공로자 고(故) 박실 님 영결안장식
4·19혁명 공로자 고(故) 박실 님의 영결식과 안장식을 11월 1일 오전, 엄숙하게 거행했습니다.

영결식에서 4·19혁명공로자회 박훈 회장은 애통한 마음으로 조사(弔詞)를 읽으며 "당신께서 그렇게 원하셨던 자유, 민주, 정의의 4·19혁명정신이 이 나라의 통치이념으로 자리매김할 때까지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어 4·19혁명공로자회 권준화 사무총장이 고인의 약력을 소개했고, 김만옥 회원국장이 4·19 비문(碑文)을 낭독했습니다. 

또한 고인의 고교·대학 친구인 유경현 전(前) 헌정회(憲政會) 회장은 추도사에서 "고인은 4·19혁명의 열사이자 투사이자 전사였다"면서 "남다른 학구열로 한평생 공부에 정진했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청렴했으며 정치인으로 올곧게 사셨다"고 회고했습니다.

영결식에 참석한 유족과 지인, 4·19혁명공로자회 김유진 상근부회장과 송창달 이사를 비롯한 회원 등 50여명은 헌화와 분향을 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고인의 정읍중학교 친구 10여명과 한국기자협회 등 언론계 후배들도 여럿 참석해 헌화·분향하며,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했습니다.

이날 영결식은 유족과 조문객이 많이 참석해 사월학생혁명기념탑 아래 맨 윗칸에서 열지 않고, 이전처럼 중간 칸 평지에 좌석을 배치해 진행했습니다.

영결식 이후 4묘역까지 운구한 뒤, 하관(下棺)-허토-묵념 순서로 안장식을 마쳤습니다.

고인은 1939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4·19혁명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 재학생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주도하며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졸업 뒤에는 언론인의 길을 걸었으며, 1963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정치부 차장 시절인 1977년 한국기자협회(16대) 회장을 지냈습니다. 

1980년 1월 신민당 제2차 헌법개정 공청회에 ‘한국기자협회 고문’ 자격으로 참여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과 '헌법 전문에 언론자유 명시'를 주장해,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 당했습니다.

1984년 정치에 입문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세력과 구 신민당 계열 인사들이 모인 신한민주당 창당 작업을 주도하며 창당선언문을 쓰고 대변인을 맡았습니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서울 동작에 출마해 당선된 뒤 내리 3선을 했고,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장관급인 국회 사무총장을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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