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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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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셋재주 탐방 - 남은 여중용선생 순충기념비
부서 지도과
남은 여중용선생 순충기념비(南隱 呂中龍先生 殉忠紀念碑) □ 소재지 : 경북 김천시 남산동 (남산공원 내) □ 건립기관 : 여중용선생기념사업회 □ 건립일자 : 1967. 5. 27 □ 시설규모 : 높이 4.8m □ 관리기관 : 김천시장 □ 내용  여중룡 선생(1856.3.5~1909.12.24)은 경북 금릉군 구성 김평 출신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김산 향교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이기찬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군비 2천냥을 부담하며 예건대장기(禮建大將旗)와 금산복의대장기(金山伏義大將旗)를 만들어 세우고 금산 구성 지례등지로 진군하였으나 구성에서 일군과 연합한 관군에 패전하였다. 1903년에는 날로 나라가 기울어가는 것을 우려하여 전국의 의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국난에 대처하여야 한다는 논지의 오백의사론을 비롯하여 양병론을 발표하여 세론을 환기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904년 3월에는 서울에서 충의사(忠義社)를 조직하고 133명의 지사를 규합하여 매년 2회씩 모여 국사를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해 여중용은 일본전권대사 이등박문(伊藤博文)을 비롯하여 주한일본공사, 주한일본육군사령관, 영국, 미국, 프랑스, 청국, 독일 등 외국공사, 일진회, 정부삼판서(政府三判書)에 항의서한을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위협하는 조약이나 군사 활동이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다고 경고하였다. 그 일부는 전문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게재되어 여론을 진작하는데 기여하였다.1905년 5월에는 마침내 이병구(李秉九)·지우석(池禹錫)·우용택(禹龍澤) 등과 밀의하여 일본공사관 폭파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탐지되어 동년 7월 24일 앞서의 항의서 발표와 관련하여 일본헌병대에 연행 구금되었다가 다시 폭파계획사건에 관련된 사실이 겹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7개월 만에 석방되었으나 혹독한 고문으로 조골(助骨)이 부러지는 등 상처를 입었다. 1906년 5월에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허 위, 이강년 등과 의병을 일으키기로 밀의하여 허 위는 안동, 이강년은 상주, 여중용은 금산에서 각각 의병을 일으켜 서울에 입성하기로 약조하였다. 약속에 따라 동년 8월 여중용은 귀향하여 김산군 병기소에서 무기를 수합하고 180명의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병석에서 졸도하여 일어나지 못하였다. 1909년 12월 3년여의 투병 끝에 "죽어 귀신이 되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1977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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