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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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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주년 광복절 계기 이영삼 선생 등 독립유공자 128명 포상
작성자 : 이현주 작성일 : 조회 : 4,665
부서 공훈발굴과
연락처 044-202-5458

제72주년 광복절 계기 이영삼 선생 등 독립유공자 128명 포상


□ 국가보훈처(장관 피우진)는 8월 15일(화) 제72주년 광복절을 맞아 1909년 전북 김제·전주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중 순국한 이영삼(李永三) 선생 등 12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고 밝혔다.

  -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63명(애국장 12, 애족장 51), 건국포장 16명, 대통령표창 49명이다.

  -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2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  이로써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0,760명, 건국포장 1,212명, 대통령표창 2,807명 등 총 14,779명에 이른다.


□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 관련기관과 사료수집 협업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예정이다.


□  특히, 국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알려지지 않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데 노력해나갈 계획이다.


□ 제72주년 광복절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o 의병의 군수물자 운반하다 체포되어 옥중 순국한 이영삼 선생
    - 전라북도 김제, 전주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이영삼(李永三)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 선생은 전북 임피(현재 군산) 출신으로 1909년 (음력) 7월 8일 박찬중(朴贊仲) 의진에 참여하여 전북 함열(현재 익산), 전주, 금구(현재 김제) 일대에서 군수물자를 운반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 선생에 대한 포상은 국가기록원에서 수집한 '합장부'(전주형무소, 1916)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수감된 지 5개월 만에 옥중에서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 '합장부'는 일제하 형무소에 수감 중 사망한 사람들을 가매장·합장한 내용을 간단하게 기록한 문건이다.
    - 선생의 옥중 순국은 일제의 악형(惡刑)이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비전투 의병에게도 예외 없이 잔혹하였음을 보여준다.


  o 대학 재학 중 평양에서 독립만세시위 주도한 김태술 선생
    - 평양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태술(金泰述)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 선생은 1919년 3월 1일 평양 장대현에 소재한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광무황제 봉도회(奉悼會)에 참가하여 참여 군중의 선두에서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 3월 15일 경에는 독립만세운동 선전을 위해 일제에 보내는 2∼3건의  경고문을 작성, 인쇄하였다.
    - 이후 선생은 미국인 선교사 모우리(E.M. Mowry)의 자택에 피신해 있다가 4월 5일 경 10명의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 모우리는 3·1운동 당시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일로 일제에 체포되어 재판까지 받은 선교사로,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 선생에 대한 포상은 선교사들이 3·1운동을 적극 지원한 사례로도 주목된다.


  o 강화도에서 만세시위 참여하다 체포되어 태형받은 계기봉 선생
    - 강화도에서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태형을 받은 계기봉(桂基奉)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 선생은 기독교 신자로 1919년 3월 18일 경기도 강화군 부내면 읍내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태 90도를 받는 등 고초를 치렀다.
    - 부내면 읍내시장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기독교도 유봉진(劉鳳鎭, 1990 애족장)이 목사 이진형(李鎭亨)의 집에서 황도문(黃道文, 2001 건국포장) 등과 회합하여 계획을 모의하였다.
    - 동월 18일 읍내시장에서 염성오(廉成五, 1990 애족장), 유희철(劉熙哲, 1990 애족장) 등과 함께 '강화군민에게'라는 격문을 뿌리며 1만여 명에 이르는 군중이 집결한 강화도 최대의 대규모 시위였다.
    - 선생에 대한 포상은 국가보훈처의 자체 발굴 후 후손 확인을 거쳐 이루어졌다.


  o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 주도한 열혈 여학생, 최윤숙 선생
    - 1930년 초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최윤숙(崔允淑) 선생께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 선생은 1930년 1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1929년 11월에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된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여 학생시위를 주도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 최복순(崔福順, 2014 대통령표창) 등 학우들과 함께 진명·숙명여자고보 등 서울시내 다른 여자고보와는 물론, 휘문고보 등 남자고보와도 연대해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에 앞장섰다.
    - 선생 등은 광주학생운동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고 일제의 식민정책과 교육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 선생의 활약상은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동조시위에 참여하는 여학생들의 참여 방식과 활동 양상을 잘 보여준다. 


  o 독립운동 지원에 앞장선 미주 독립운동계 대모 박영숙 선생
    - 미국에서 여러 여성독립운동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지원에 앞장선 박영숙(朴永淑)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 선생은 1919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 서기,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위원, 1921년 국민대표회 다뉴바지방회 회원, 1922년 대한여자애국단 다뉴바 총부 재무로 활동하였다.
    - 이어 1930년부터 1939년까지 대한인국민회 딜라노 지방회 회원,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 딜라노지부 재무, 1943년 동 지부 단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며,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의연’, ‘의무금’, ‘특별연’, ‘3·1절 기념금’, ‘국치기념금’, ‘독립금’, ‘광복군 후원금’ 등의 명목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한국광복군 등에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 대한인국민회 집행위원장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부위원장 등으로 미주 독립운동을 이끈 한시대(韓始大, 1995 독립장) 선생이 남편이다. 


  o 식민지 본국의 차디찬 감옥에서 독립을 절규한 윤구용 선생
    - 일본에서 반제 항일운동 조직에 참여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윤구용(尹九鏞)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 선생은 1929년 경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체류 중 1933년 ‘민족의식’으로 무장하고 활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6개월 여 동안 유치되었다.
    - 이듬해 2월 반제 동경지방조직(반제동맹 동경지방위원회)에서 활동하다 다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병 보석으로 석방 직후 서거하였다.
    - 선생에 대한 포상은 '특고월보'(1934.1∼1937.12) 기사 및 동경 체류 중 국내의 부친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활동내용 등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 1930년에 보낸 편지 한통을 소개하면 “봄은 왔습니다. 계급적 구속과 민족적 억압의 이중 질곡에 신음하는 우리 반도의 대자연은 그 은택을 균점(均霑)하리니 (중략) 우매한 불초자도 중첩한 민족적 모욕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더욱 높게 더욱 강하게 자라가겠습니다.
    - (중략) 금번의 조선학생사건은 일본신문의 역선전에도 불구하고 그 파란의 상당히 광범함을 규지(窺知)하겠습니다.
    - (중략) 젊은 동란들의 풍미한 거동이야 참으로 통쾌치 않습니까?”라고 하여 적도(敵都) 동경에서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할 것임을 맹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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