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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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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현천묵 선생 선정
작성자 : 이광현 작성일 : 조회 : 1,562
부서 공훈관리과
연락처 044-202-5770

   2018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현천묵 선생 선정

      민족교육과 항일무장투쟁을 병행한 선각자


□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현천묵 (玄天?, 1862.4.9.∼1928) 선생을 2018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 현천묵 선생은 함경북도 경성군 출신으로 40대 중반이었던 1906년 보성학교 학감으로 학교의 주요 업무와 학생들을 관리?감독하며 본격적인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1909년 보성학교의 교장과 경성향교 직원으로 활동하며 지역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경성지회에 참여했고, 이후 지회장을 맡아 경성지회의 활동을 공고히 시키고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선생은 대한협회 경성지회를 이끄는 수장으로 교육과 자강을 통해 구국의 방법을 모색했으며, 경성의병을 지원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항일전선에 앞장섰다.
 ○ 1909년 선생은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여 단군교(대종교)에 입교했고, 1910~11년 사이 북간도로 망명했다. 우리겨레, 우리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대종교 이념은 선생에게 다시금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해주었다.

 ○ 북간도 망명 이후 선생은 서일과 함께 중광단을 조직하여 대종교 포교에 앞장섰고, 대종교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의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을 이어가며 이주한인 자녀들에게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고, 이들이 독립군으로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 또한 1919년 대한군정서의 부총재를 맡아 총재 서일을 보좌하며 단체를 이끌었고, 청산리 전투 이후 조직된 대한의용군 총사령부(후에 대한독립단)의 부총재를 맡았다. 1921년 자유시참변의 충격으로 서일이 자결한 후에는 대한군정서의 총재를 맡아 조직의 재정비를 담당했다.

 ○ 대한군정서 총재로서 선생은 단체를 재정비하며, 대종교 포교 및 한인들의 교육,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그리고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과 검사원장 등의 직책을 맡으며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현천묵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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