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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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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8월의 6.25 전투
작성자 : 황정옥 작성일 : 조회 : 1,501
부서 제대군인정책과
연락처 044-202-5720

우리가 알아야 할 8월의 6.25 전투

    

□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 70주년 및 6·25전쟁 65주년을 맞이하여 국가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웅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그들의 호국정신을 후손에 알리고자 “우리가 알아야 할 이달의 6·25전투”를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 8월의 “우리가 알아야 할 이달의 6·25전투”로는 1950년 8월 낙동강 교두보를 지켜내어 6·25전쟁 최대의 위기를 극복한 ‘다부동 전투’, 유엔군의 첫 반격작전인 ‘마산 진동리 전투’, 포항 탈환과 북진의 발판이 된 ‘형산강 전투’가 선정되었으며 주요 작전 내용은 다음과 같다.


 ◈ 6·25전쟁 최대의 위기를 극복한 다부동 전투◈

  다부동 전투는 국군 제 1사단(사단장 준장 백선엽)이 1950년 8월 3일부터 9월 22일까지 이 지역 일대의 주저항선에서 대구를 공략하려는 북한군 3개 사단을 상대로 혈전을 벌인 끝에 이를 저지하며 대구를 사수한 전투다.


  당시 북한군은 약 21,500명의 병력과 T-34전차 약 20대 및 각종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해왔다. 그러나 우리 군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한 7,600여 명의 병력만으로 엄청난 병력 차이를 극복하고 북한군의 공세를 한달동안 끝까지 막아내었다. 


  이 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 김점곤 소장(당시 중령)이 지휘하는 국군 제1사단 12연대였다. 그는 특공대를 편성하여 적 전차 4대를 파괴하는 등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일조하였다. 


  다부동 전투의 결과 북한군 사단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으며, 특히 병력 피해 뿐 아니라 사단 참모장, 포병연대장, 연대작전참모가 귀순해옴으로써 북한군의 전투력 부족과 사기 저하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 국군 역시 장교 56명을 포함해 2,300여명의 전사자를 내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국군 제 1사단은 치열한 혈전끝에 낙동강 전선 최대의 격전지로 알려진 다부동을 수호하여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 작전을 개시하는데 일조하였다. 나아가 6.25전쟁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낙동강 교두보를 지켜내어 대한민국을 구하는데 큰 보탬이 되었다. 



◈ 유엔군 첫 반격작전에서 승리한 마산 진동리 전투 ◈  

   마산 진동리전투는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적의 예봉을 꺾고 부산 진출을 시도하던 북한군을 저지한 전투다. 이때 국군 해병대는 북한군 6사단의 정찰대대를 궤멸시키는 혁혁한 전공을 세워 전 장병이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렸다. 

  낙동강 공방전이 가열되기 시작한 1950년 7월 말 북한군 6사단은 마산을 통해 부산을 점령한다는 계획 아래 호남 지역에서 대우회기동을 개시했다. 북한군 6사단은 빠르게 진주를 점령하고 마산으로 향했다. 이에 미 8군 워커 중장은 대규모 반격 작전을 계획했다. 


  미 육군 25사단과 미 제5연대 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된 한국 해병대의 김성은 부대와 육군의 민기석 부대 등을 동원해 저지 작전에 나섰다. 


  진동리지구에 투입된 25사단과 그 배속부대들은 진주를 탈환하기 위해 거듭된 패주를 멈추고 개전 이래 첫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 기간 중 한국 해병대의 김성은 부대는 8월 1일 새벽 고사리 지구에서 북한 6사단을 공격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김성은 부대는 8월 3일 전차와 사이드카를 앞세우고 아군 방어진지로 향하는 적 대대병력을 공격해 전차 2대와 트럭 4대, 지프 2대를 파괴했다. 6일에는 진동리의 미 27사단에 배속돼 적에게 점령당한 야반산을 공격해 탈취했다. 12일에는 중암리(함안군 군북면)로 이동해 패퇴한 적이 집결한 오봉산과 필봉을 북에서 남으로 공격해 일부 목표를 점령하는 등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진동리전투는 유엔군의 첫 반격작전 승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약 2주의 전투 기간 동안 진동리 근처 고지의 주인이 19번이나 바뀔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하지만 이곳을 지키면서 북한의 서남쪽을 통한 부산 진입 전략이 좌절됐고 이후 낙동강 방어선을 지킬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진동리전투의 승리가 있었기에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이 가능했다는 평가도 있다.



◈ 포항 탈환과 북진의 발판이 된 포항 형산강 전투 ◈ 

  포항 형산강 전투는 1950년 8월 11일부터 9월 23일까지 2,301명이 전사한 혈전을 통하여 우리군 최후의 방어선인 형산강을 사수하고 나아가 북한군 12사단이 점령한 포항 일대의 탈환 및 북진의 교두보를 형성한 전투이다.

 

  당시 3사단 22연대 1대대 소속 분대장 연제근 상사(당시 이등중사)의 일화는 유명하다. 연제근은 9월 17일 새벽 4시 형산강 도하작전의 가장 큰 장애물인 적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국군의 형산강 도하 통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13명의 특공대를 조직하여 사전 도하 돌격을 감행하였다. 도하 도중 연제근은 적의 기관총 유탄에 어깨를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었으나, 기어이 전진하여 수류탄 3발로 적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한 뒤 적탄에 장렬히 산화하였다. 연제근 상사를 비롯한 특공대의 장렬한 산화는 이후 아군의 성공적인 도하작전 뿐 아니라 포항 탈환과 북진의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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