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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국가보훈부(국문) - 보도자료 상세보기 - 제목, 작성자, 부서, 작성일, 조회수, 연락처, 내용, 보도 일시, 종료일, 파일 정보 제공
2018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작성자 : 이광현 작성일 : 조회 : 4,598
부서 공훈관리과
연락처 044-202-5771

 

        중국과 러시아를 누비며 무장투쟁 한 대한신민단 단장
     
      2018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김규면 선생 선정


□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규면 (金圭冕, 1880. 3. 12.~1969. 2. 2.) 선생을 2018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1880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난 선생은 시대의 전환기인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운영하는 육군무관학교 속성과에 입학했다. 1904년 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의정서에 근거하여 육군무관학교를 통제했다.
    무관이 되어 조국 부강을 염원했던 선생의 꿈은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1907년 훈춘(琿春)으로 망명한 선생은 민족종교 단체인 대한성리교(大韓聖理敎)를 만들었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에 포교규칙(布敎規則)을 공포하자, 이에 반발하며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스스로 무관이 되지는 못했지만, 청년들을 독립전사로 양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1914년 이동휘와 함께 중국에서 설립한 동림무관학교를 들 수 있다.
  ○독립전쟁을 통해서 독립을 달성하려는 선생의 노력은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결성으로 이어졌다.
     3·1운동에 호응하여 결성된 대한신민단에서 단장으로 활동했으며, 여기서 보여준 그의 헌신은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 1924년 윤자영과 함께 상해에서 조직한 상해청년동맹(上海靑年同盟)을 통해서 중국 학생계와 연대를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피습을 당하여 부상을 입게 되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 활동 전개에 한계를 절감한 선생은 연해주로 갔다. 1933년 빨찌산위원회에서 항일운동을 하였지만,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의 탄압대상이 되었다.
     모스크바로 피신한 후 더 이상의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선생은 러시아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귀국을 하지 못한 채 1969년 8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김규면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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