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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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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의 숨은 영웅 나중소 선생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작성자 : 강병구 작성일 : 조회 : 1,176
부서 공훈심사과
연락처 044-202-5451

청산리대첩의 숨은 영웅 나중소 선생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청산리대첩에서 활약한 나중소 선생(羅仲昭, 1867.4.13.~1928.8.18.)을 2016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 선생은 경기도 고양군(현재 서울 정릉) 출신으로 16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副尉)로 재직 중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등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 1919년 3월 선생은 북간도 왕청현에서 서일 등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정의단의 교관으로 초빙되어 수백 명의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참모부장에 임명되어 사령관 김좌진을 보좌하며 부대를 이끌었다.

  ○ 선생은 북로군정서군의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300여 명의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였으며, 청산리대첩에 참전하여 백운평과 천수평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 청산리대첩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 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 정예군대와 10여 차례 벌인 전투였다. 1,300명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뒀다. 

  ○ 청산리대첩 후 선생은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이만 지역으로 이동하여 1921년 4월 36개 독립군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대한독립단 참모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이 일어나자 북만주로 돌아왔다.

  ○ 1922년 1월 안도현 군인양성소 사령관에 임명되어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였으며, 같은 해 8월에는 9개 독립군 단체들의 군사통일체로 대한독립단을 재건하고 전 만주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4년 3월 대한군정서가 재조직되었고, 선생은 서무부장 겸 참모에 임명되었다.

  ○ 1925년 3월 영안현에서 신민부가 조직되자 선생은 중앙집행위원회 참모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신민부와 정의부의 연합부대에서 간도의 훈춘, 장백 및 함경도 등을 관할하는 서남로향관(餉官)에 임명되었다. 

  ○ 선생은 1928년 8월 신민부 지방조직을 설치하던 중 돈화현 산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독립군 양성과 청산리대첩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나중소 선생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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