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문일민, 안혜순 선생 공적내용 | |
부서 | 보훈기록관리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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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는 “초지일관 열혈 독립운동에 헌신한 부부독립운동가인, 문일민(1962년 독립장), 안혜순(2019년 건국포장) 선생을〈2023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 1920~30년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 또는 임정) 또는 의열투쟁 계열에서 부부독립운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남편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하는 한편, 어려운 형편 속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 그리고 임정의 지도자와 독립운동가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 즉 ‘살림’을 도맡았다. 이들이 없었다면 임시정부 자체가 유지되기 어려웠을 만큼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살림’은 매우 중요했다. 여성의 일이라고 규정되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살림’이 바로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살리고, 고난에 처한 우리 민족을 살리는 실천적 투쟁이자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 문일민 선생은 1894년 12월 10일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咸從面) 함종리(咸從里)에서 문명순(文銘純)과 안명숙(安明淑)의 2남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호는 무강(武剛․武岡), 무리(武利)이다. 처음 이름(본명)은 희석(熙錫)이었으며, 다른 이름으로 문강(文剛)·문일민(文逸民․文逸敏)·문현철(文賢哲․文賢喆) 등이 있고, 중국이름은 왕량(王良)이다. ○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함종의 함일학교(咸一學校)에서 수학하였다. 평양에서 물산위탁 판매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가한 다음, 그 해 7월 남만주 서간도 지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 뒤 남만주 독립운동 단체인 한족회(韓族會)에 참가하여 한족회의 명령으로 평양에 잠입하여 애국청년회의 연락과 조직 강화 활동을 벌이고 남만주 본거지로 복귀했다. ○ 1919년 12월 선생은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여 별동대 대원으로 활동했다. 대한청년단연합회는 1920년 9월 18일 미국 국회의원단의 조선 방문(방한)에 맞추어 국내 주요 도시의 일제 기관 폭파와 일제 요인 처단 등의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사를 국제 사회에 알리기로 결정했다. ○ 이에 따라 선생은 국내에 파견되는 행동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되어 활동하던 남만주 독립운동 조직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는 일종의 국내 특공대로 서울·평양·신의주와 평안북도 선천 방면으로 3개 행동대를 파견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장덕진(張德震)·박태열(朴泰烈)·우덕선(禹德善)·김예진(金禮鎭)·안경신(安敬信) 등과 평양에 파견되는 제2대에 속하였다. ○ 선생은 대한광복군총영 평양 폭탄특공대 소속으로 국내에 침투하여 평남도청 투탄 의거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대장 박태열을 비롯하여 표영준(表英俊)·우덕선·김예진·안경신 등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평남 안주군 입석(立石)에서 일본 경찰 한 명을 사살하고 평양 시내로 잠입했다. 이들은 1920년 8월 3일 밤 9시 50분 평안남도경찰부 청사에 폭탄을 던져 장벽 일부를 파손시켰고, 같은 시각 평양부청(당시 평양시청)과 평양경찰서에도 폭탄을 던졌다. ○ 선생은 우덕선과 함께 피신 중 평양성 칠성문 부근에서 검문하는 일본인 순사 요코야마(橫山)를 사살하였다. 우덕선·박태열·장덕진은 만주를 거쳐 중국 상하이(上海)로 돌아갔다. 그는 홀로 남아 의열투쟁을 지속하다가 1921년 초 상하이로 갔다. 그러나 안경신은 평안남도경찰부 청사 폭탄 투척의거 이후 함남 이원(利原)에 피신하여 은신 중 경찰에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때 박태열·장덕진·우덕선 등과 함께 궐석판결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국내에 남아 활동하던 표영준도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 이후 선생은 1920년 12월 광한단(光韓團)·대한독립단과 함께 평양 북금융조합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탈출했다. 이후 상하이로 간 그는 흥사단·대한교민단·대한민국임시정부·민족혁명당 등에 참여하면서 친일파 처단 공작을 주도하기도 했다. 1934년 4월에는 일본에 협조적이던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의 프랑스 영사 암살계획을 세우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 한편, 선생은 1926년 침체 상태에 처한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임시정부의 안전을 강화할 목적으로, 박창세(朴昌世)·강창제·이수봉(李秀峰)·이운환(李雲煥) 등과 상하이거류민단 의경대(義警隊)를 주축으로 조직된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 결성에 참여했다. 같은 해 남만주의 대표적 독립운동 통합조직인 정의부(正義府)로 가서 군사참모 주임으로 활동했으며, 정의부 산하 독립군의 훈련과 작전을 담당했다. ○ 이후 1928년 2월 1일 열린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이사회에서 특별회원으로 입회가 허가되었고, 정의부 특파원으로 중국 광둥성(廣東省)에 파견되어,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당국과 군사원조 관련 교섭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 그러던 중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잘 알고 지내던 권기옥(權基玉) 삼촌의 중매로 안혜순(安惠淳)과 재혼했다. 1930년 3월 상하이로 귀환하여 잠시 중국군 상교(上校, 현재 대령급 장교)로 복무하였다. 1930년 5월 상하이에서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에 입단하였다(239단우). ○ 선생은 1933년 1월 15일 상하이에서 소집된 한국독립당 제6차 대회에 제5구 대표로 참석하여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감사에 선임되었고, 1935년 2월 15일 개최된 제7차 대회에는 유진동과 함께 ‘제4구 대표’로 참석하였다. 1934년 봄 박창세·차리석 등과 항저우(杭州)로 옮겨가, 한국독립당 사무소에서 김사집·이창기·이중환·이상일 부부·박경순 부부와 함께 생활했다. 같은 해 7월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사무소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 사실이 포착되면서, 11월 초순 항저우시 서대가(西大街) 도항리(濤桓里) 12호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전 직전인 10월 30일부터 11월 3일까지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었고, 조완구·신공제와 함께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이 시기 상하이 대한인교민단의 간부로도 활동했다. 1933년 5월 당시 정무위원이었으며, 1934년 6월 경에는 서기를 맡았다. ○ 선생은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광동지부장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9월 “김원봉 일파의 공산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싫증을 느끼고” 박창세·조소앙 등과 탈당하여 한국독립당 재건을 선언하였다. ○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중국국민정부를 따라 관내지역을 유랑할 때도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즉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이후부터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의 피난 과정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 계속 참석했던 것이다. 그는 임시정부가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 안착한 뒤인 1941년 10월 15일 열린 제3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도 출석했다. 1942년 10월 25일 열린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상임위원회 제3과(재무·예산·결산) 위원으로 활동했다. 10월 28일에는 최동오·조완구·이복원·조성환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단기간 내에 중·미·영·소 등 연합국 정부에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건’ 제안에 참여했고, 이튿날인 10월 29일에는 신영삼·왕통·한지성과 같이‘국가와 군가 제정’안을 제안하였다. ○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도 1943년 4월 2일 임시정부 교통부 총무과장에, 1944년 10월 23일에는 참모부 참모에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충실히 앞장섰다. 1943년 10월 9일 열린 제35회 임시의정원의 회기 중인 11월 15일 회의에서 “굶어 죽을 각오로” ‘한국광복군 활동 9개 준승(準繩, 따라야 할 기준)’의 무효를 선언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준승은 중국국민정부가 광복군을 견제할 목적으로 규정한 9개 조항의 규정이었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에서 주로 조선민족혁명당(당시 임정의 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굴욕적인’ 9개 준승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생은 군관학교 출신답게 한국광복군의 자주성을 주장하는 대표적 강경론자였다. 그는 의정원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한국광복군 9개 준승(準繩)’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강경론은 결국 광복군 9개 준승이 폐지되어 광복군의 자주성을 관철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1944년 4월 14일 소집된 조선민족혁명당 제8차 대표대회에서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고, 1945년 2월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유동열·신영삼·신공제·강창제 등을 중심으로 한 신한민주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 1945년 4월 11일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도 상임위원회 제3과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일본의 패망이 가시화된 시점인 1945년 8월 13일에는 박건웅·손두환·유동열·김약산 등과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장차 성립될 전국 통일적 임시의회에 봉환하기로 하고, 임시의정원의 직권을 정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의안 제안에 참여하였다. ○ 일본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개회한 제39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8월 23일 손두환·유동열·김약산 등과 “국내 및 국제적 정세에 비추어 현 내각은 즉시 총사직하고 간수내각(看守內閣)을 조직하여 시의(時宜)에 필요한 일체 시급한 사무를 처리토록” 하자는 의안을 제안하였다. ○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안혜순(安惠順) 선생은 1903년 1월 6일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북하리(北下里)에서 태어났다. 1905년 출생설도 있다(후손측 주장). ‘안혜순(安惠淳)’으로 한자가 달리 표기되기도 한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오빠와 함께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1928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문일민과 결혼하여 상하이(上海)에 거주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한 남편을 도왔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부인들로 구성된 ‘한인애국부인회’에 참여하였다. 특히 1935년 2월 상하이 한인애국부인회 정기총회를 주도하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이듬해 12월에는 한인애국부인회 간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뢰로 각종 기념일에 필요한 기념 전단을 인쇄하여 배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 선생은 상하이에 거주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편 문일민의 내조와 임시정부 관련 활동 지원을 통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상하이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식사 제공 등 음식 만드는 것을 도맡았다고 한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안여사의 음식 솜씨가 최고’라는 말을 자주 했을 정도였다. ○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 투척 사건과 관련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1932년 4월 29일 훙커우공원 의거를 앞두고 백범 김구가 선생에게 도시락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의거 당일 도시락 하나에는 밥과 반찬을 담지 말라는 지시가 전해졌다. 그 도시락에는 윤의사가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등에게 던질 폭탄이 담겼던 것이다. ○ 선생은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남편 문일민의 지원 등에 무척 고생을 많이 했으며, 비록 여성이었지만, 강한 의지로 역경을 헤쳐가면서 가족들의 생활을 이끌어왔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녀는 1940년대 문일민과 임시정부를 따라 중국 쓰촨성의 충칭까지 따라갔다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3남 1녀를 데리고 국내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이후 북한에 거주하다가 월남하여 서울에서 문일민을 다시 만났던 것이다. ○ 선생은 2006년 4월 15일 서울에서 향년 103세로 별세하였고,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공인하여 2019년 3월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문일민・안혜순 선생의 독립운동 헌신에 대해 그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안혜순 선생은 총칼과 폭탄을 들고 직접 투쟁하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하는 남편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는 것을 통해 국권회복을 지향하는 나라사랑과 독립운동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누군가의 아내, 어머니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더구나 어린 자식 등 가족의 안위를 돌보지 않으며, 애국애족과 공동체를 위한 헌신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과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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