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공적내용 | |
부서 | 보훈기록관리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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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부(장관 강정애)는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이룬 정의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김창환(1963, 독립장), 이진산(2014, 독립장), 윤덕보(1995, 독립장), 김원식(1968, 독립장)을 〈2024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 1872년 4월 9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김창환은 1899년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1905년까지 육군 부위로 복무하였다. 국권피탈 이후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이회영 등을 비롯한 신민회 인사들과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하였다. 구국인재를 양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경학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 1911년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암살하려 했다는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는 등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후 만주로 이동하여 1913년 5월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무장독립운동을 위한 간부양성에 매진했다. ○ 1922년 서로군정서를 재조직하고 총지휘관으로 활동하던 중 서로군정서 등 각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여 통합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 그해 8월에는 통군부를 기반으로 환인현(桓仁縣)에서 대한광복군총영 등 8단(團) 9회(會)의 대표 71명이 모여 서간도 일대의 통합무장단체의 조직을 협의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되었다. 그는 통의부 의용군 사령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 김창환을 비롯한 통의부 중진들은 1923년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를 통하여 단체 통합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대한통의부마저 분열하기에 이르자 만주지역만이라도 단체의 재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 정의부가 조직되었을 때 재무위원을 맡았으며, 1929년 북만주로 이동한 그는 홍진 등 당시 만주지역 독립운동 유력자들과 함께 생육사를 조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30년 민본(民本)정치의 실현, 노본(勞本) 경제의 조직, 인본(人本) 문화의 건설을 강령으로 삼은 독립운동정당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데 참여하였다. ○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그는 한국독립군 부사령으로 총사령 이청천을 도와 일제와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더이상 만주지역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남경으로 이주하였다. ○ 남경 이주 후 한국혁명당과 합당을 추진하여 1933년 신한독립당을 결성하는데 일조하였다. 1935년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하여 조직된 조선민족혁명당에서 군사부 위원과 중앙검사 후보위원 등 주요 간부로 활동하다가 1937년 2월 12일 중국 남경에서 사망하였다. ○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1880년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난 이진산은 1910년대 신민회 인사들이 만주에 세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후원하고, 1919년 4월 이상룡(李相龍) 등이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조직한 서간도 독립운동기관인 한족회(韓族會)의 법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서간도 지역 의원으로 윤기섭(尹琦燮)과 함께 활동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한족회의 사판사장(査判司長)이 되었다. ○ 1921년 5월 상해에서 안창호(安昌浩)ㆍ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내부갈등을 비판하고 독립운동단체의 결집을 촉구하는 격문을 배포하였다. 또한 윤기섭과 함께 서간도 대표로 국민대표회의 참석차 상해에 도착하여 한성정부 조직안의 정식 승인 등을 요구하였으며, 8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 홍진(洪震) 등 25명과 함께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보낼 한국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 1922년 7월 각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들이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를 포함한 임정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서 활동하였으며, 10월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표로 파견되었다. ○ 1923년 1월 임시정부의 향후 방향을 논의하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그는 개조파(改造派)의 일원으로 국민대표회의 특별심사위원ㆍ의정기초위원(議程起草委員)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6월 창조파가 새로운 정부 조직을 발표하자, 그는 한족회 대표 명의로 임시정부의 개선을 통한 정부유지에 힘써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 1924년 7월 이광민 등 10여 명과 함께 전만통일발기문(全滿統一發起文)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서명하였다. 또한 서로군정서 대표로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였으며, 1925년 3월 중앙행정부 법무부위원장, 8월에는 재무위원으로 정의부의 핵심요직을 맡으며, 통합단체인 정의부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 1926년 12월 길림성 반석(磐石)에서 정의부ㆍ한족노동당, 남만청년총동맹 등이 발기한 조선혁명자후원회(朝鮮革命者後援會, 일명 모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1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1919년 3월 윤덕보는 함경남도 홍원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 가입하였다. ○ 그는 군비단에서 재무부장으로서 활동하였으며, 1921년 6월 장백현 16도구(道溝) 신창동(新昌洞)에 위치한 본부총단의 산하기관인 통신사무국에서 국장 대리로서 활동하였다. 또한 같은 해 11월부터는 총단장을 역임했다. ○ 군비단이 1921년 10월 흥업단(興業團) 등 주변 독립운동단체들과 연합하여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조직하였을 때 그는 총무로 선임되었다. 또한 각 단체들의 발기로 독립운동세력을 후원하는 농민회를 조직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 1922년 군비단·흥업단(興業團)·태극단(太極團) 등이 대한광정단(大韓匡正團)을 조직하였을 때는 총무장으로 단체의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조직이 확대 개편된 1923년에 대한광정단의 단장이 되었다. ○ 1924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 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에서 조직된 정의부(正義府)에서는 통합을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행정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통합단체인 정의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 1925년 7월 임시의정원에서 개정한 헌법에 따라 국무령제를 신설하였는데 정의부 지도자인 이상룡을 임정국무령(臨政國務領)으로 임명하게 되면서 정의부 내부에서는 이에 대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이상룡은 국무령에 취임하였으며 10월에 내각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그는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 그는 이후 정의부의 중앙행정위원장·외교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27년 8월에는 정의부 특별위원으로 길림성 부근에서 활동하였다. ○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1889년 8월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난 김원식은 1919년 안동지방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더이상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중국 만주지역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서로군정서에 가입한 그는 1921년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의 지령을 받고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했다. ○ 1924년 3월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를 재정비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통합을 알리는 선언문을 발표할 때, 이진산(李震山)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 이후 정의부가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장을 보좌해 각종 기밀과 인사에 관한 총체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간정원(幹政院) 비서장(秘書長)으로 활동하였다. ○ 1924년 8월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창립대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8년 2월 한족노동당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으로 당의 명칭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유일당촉성회파가 중심이 된 혁신의회(革新議會)가 조직되자 그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새로운 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 1930년 김좌진이 한인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이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7월에 지청천 등이 북만주 위하현(葦河縣)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유호상해한국독립운동자동맹(留滬上海韓國獨立運動者同盟)의 총무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31년 11월에는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에서도 활동하였다. ○ 1932년 4월 13일에는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전 국민부 군사위원장 이웅(李雄)을 만나 만주지역의 정정(政情)과 독립운동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7월에는 남경에서 김상덕과 함께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항일무장투쟁을 강화하는 방략에 대해 논의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을 위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 1933년 11월 홍진과 함께 남경에서 한국혁명당 대표 윤기섭(尹琦燮)과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결성하여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 이후 북경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인 입교생을 모집하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는데, 이를 위해 만주에서 함께 활동하였던 김두천(金斗千)에게 서신을 통해 만주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입교생의 모집을 의뢰하여 만주 각지에서 18명의 학생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한국인들은 독립을 열망하였다. 1919년 3.1운동은 독립의 방법에 대한 해법을 알려준 준 사건이었다. 그것은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 그중에서도 무장을 통한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 김창환, 이진산, 윤덕보, 김원식과 같은 사람들 역시 그 시작과 활동단체는 달랐지만 지향했던 바는 한국의 독립이었던 만큼 그 길로 가기 위한 과정으로서 탄생한 정의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 매진하였다. 비단 이들 뿐만 아니라 당대 만주지역에서 활동했던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오직 독립을 위해, 그 뜻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며 그 척박한 대지에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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