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청소식

지(방)청소개

국가보훈부(국문) - 우리청소식(충북북부보훈지청) 상세보기 - 제목, 내용, 파일, URL 정보 제공
2003.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안녕하세요? 우리지청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매월 독립운동가를 선정하여 공훈을 널리 알리고 기리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에 국가보훈처와 광복회에서 선정한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호"선생님과 광복회충북지부.충주보훈지청.청주보훈지청에서 선정한 우리고장출신 독립운동가 "안광득", "조동식"선생님의 공적을 게재합니다. @@@@@@@@@@@@@@@@@@@@@@@@@@@@@@@@@@@@@@@@@@@@@@@@@@@@@@@@@@@@@@@@@@@@@@ 김호 (1884. 5.25 - 1968. 1. 5) 서울 사람이다. 1914년 이래 대한인국민회 등 미주지역 한인단체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호는 망국의 현실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뜻을 세우고 1912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4년 상해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노동에 종사하며 대한인국민회에 참가하여 재미 한인사회의 규합에 힘을 쏟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미주지역에서는 이에 호응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때 그는 샌프란시스코 국민회중앙총회의 특파위원이 되어 미주 서부지역을 2개월 동안 순회하면서 10,000원 이상의 독립자금을 수집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무렵 그는 독립 달성을 위해서 국제적 외교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9년 12월 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사회개진당(勞動社會改進黨)을 조직하였다. 노동사회개진당은 파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외교활동을 벌이던 조소앙(趙素昻)을 후원하기 위해 조직된 독립운동 후원단체로, 김호는 노동사회개진당의 선포문을 낭독하는 등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의 재정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일환으로 1920년 회사를 설립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공으로 대일투쟁의 전선이 중국 관내지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독립운동세력들이 좌·우의 이념을 초월한 통일전선을 모색하고 있을 때, 그를 비롯한 미주지역 국민회 인사들은 대한독립당을 결성하고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는 등 통일전선에 참가하였다. 한편 1936년 로스엔젤레스에서 한인사회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국민회 리들리지방회를 재건할 때, 김호는 대의원에 피선되어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발전에 노력하였다. 그는 1937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45년과 1949년에도 총회장,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1941년 4월 20일 미국 하와이 호놀롤루에서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될 때 김호는 한시대(韓始大)·송종익(宋鍾翊) 등과 북미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결성에 적극 참가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호놀롤루에 동위원회의 의사부(議事部)를, 로스엔젤레스에는 집행부(執行部)를 두었는데, 이때 그는 집행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런 가운데 1941년 말 일제가 하와이를 기습 침공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호 등은 조국 독립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력 양성을 위한 계획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 1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는 한인국방군 편성계획을 미육군사령부에 제출하고, 로스엔젤레스에 한인국방경위대로서 맹호군(猛虎軍)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계획을 중경의 임시정부에 알려 1942년 2월 정식 인준을 받아낼 수 있었다. 1942년 5월 태평양전쟁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독립 달성의 구체적 방도를 모색하고자, 중경의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중국에 특파원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때 김호는 중경특파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김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장으로 1942년 8월 29일 국치기념일을 기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서 보장받기 위한 일환으로 미국 당국과 협의하여 로스엔젤레스 시청에 헌기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국기가 1910년 망국 이후 32년만에 외국 관청에 게양될 수 있었다. 특히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일제의 패색이 짙어가는 가운데 이들은 종전 후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서 보장받기 위하여 국제외교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임시정부도 그와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1944년 8월 종래 주미외교위원부를 주미외무위원회로 개조하고, 같은 해 11월 이승만·김원용·김호 등을 위원으로 선임하였다. 1945년 3월 8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연합국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의하고, 재미 인사 가운데 김호·한시대·송헌수 등을 대표로 선임하였다. 김호는 광복 후 1945년 10월 재미한족의 국내파견 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하여, 1946년 12월 남한과도입법의원으로 활약하였으며,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안광득(1897. 9. 12 - 0933. 1. 8) 충북 영동(永同) 사람이다. 영동군 매곡면 옥전리(梅谷面 玉田里)에 거주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듣고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3일과 4일 양일간 매곡면은 각 촌락이 모두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옥전리·노천리(老川里)에서는 밤을 이용하여 주민 100여명이 모여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음날 4일 오전 11시경에는 시위군중 약 800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노천리 면사무소에 쇄도하였다. 그는 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시위군중과 함께 추풍령(秋風嶺) 헌병분견소로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월형을 언도받았으나, 공소를 제기하여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위소되고 징역 1년 2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조동식(1873. 1. 22 - 1949. 2. 24) 충청북도 청원(淸原)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부터 3일간에 걸쳐 밤마다 강내면(江內面) 대성리(臺城里)에 있는 대성산상에서 부락민 수십명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사기를 올렸다. 첫날인 23일에는 면내의 18개 부락과 인접한 강외(江外)·옥산(玉山)·남이면(南二面) 등지에서도 호응하여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제는 청주와 조치원 등지의 경찰·헌병·수비대를 동원시켜 시위행렬을 제지하고 총기를 휘두르며 여러 사람을 잡아 연행하니 새벽 1시경에야 시위가 끝나게 되었으나, 이튿날인 24일과 26일에도 횃불시위는 계속되어 충남 연기군(燕岐郡) 동면(東面) 응암리(應岩里)에서 이에 호응하였고, 27일에도 동면의 예양리(禮養里)에서 횃불시위가 전개되었으며, 4월 1일에는 청주·오창·강의·부용면에서 횃불시위가 벌어지고, 또한 북일·북이·강내·오산면에서도 일어남으로써 도합 8개면, 즉 청주군의 서북쪽 태반이 모두 불바다와 만세소리로 진동케 되었다. 그는 또 그의 집에서 3월 25일 김재형(金在衡)이 보낸 사람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을 고취시키는 비밀 격문 약 50매를 받아서 허영대(許永大)로 하여금 화정리(華亭里) 일대에 배포시키는 등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파일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