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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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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우리고장 출신 독립운동가
부서 보훈과
9월의 독립운동가 『김송근(金松根) 선생』주요공적 (1901. 9. 16 ∼ 1957. 4. 16) 울산 동동 출신인 선생은 1919년 병영 3·1운동을 주도하신 분으로 탄신 102주기를 맞이하여 자랑스런 우리고장(울산·양산) 출신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으며, 주요공적은 다음과 같다. 울산 동동에서 1901년 출생한 선생은 1919년 4월 4일 병영 일대에서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서울에서의 3·1독립만세운동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정의감에 넘치던 병영 청년회 간부들도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거사일을 정하였다. 청년들은 4월 3일 이종근의 집에서 비밀모임을 가지고 거사에 대해 논의한 뒤, 권작지의 집에서 이현우, 박영하 등이 태극기와 독립기를 제작하고 카본 복사지로 2백여 장의 독립선언서도 만들었다. 거사일인 4월 4일 아침, 청년회원들은 왜경주재소를 피해 뒷길을 돌아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 교정에 모여들었다. 오전 9시경 선생은 이근복, 최원득과 함께 등교가 막 끝난 학생 100여명을 합세시켜 태극수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었다. 이종필이 독립선언서를 읽고 난 뒤 오전 11시 40분경 양석룡이 축구공을 차 올리는 것을 신호로 하여 청년들과 학생들은 일제히 태극수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거리는 삽시간에 감격과 흥분으로 넘쳤고, 청년회원들은 쏟아져 나오는 주민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며 시위행진을 계속하였다. 병영 청년들은 주민·학생들과 함께 이틀 동안 조국의 독립을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일본순사와 수비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4명이 순국하고, 22명이 구금되었다. 선생은 이 때 일경에 체포되어 태형 90도형을 받았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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