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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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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우리고장 출신 독립운동가
부서 보훈과
10월의 독립운동가 엄주태(嚴柱泰) 선생 (1900. 10. 18~1928. 11. 2) 경남 양산 출신인 선생은 1919년 양산 3·1운동을 주도하신 분으로 탄신 103주기를 맞이하여 자랑스런 우리고장(울산·양산)출신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으며, 주요공적은 다음과 같다. 경남 양산 읍에서 1900년 출생한 선생은 1919년 3월 1일 양산 일대에서 있었던 조선독립시위운동을 주동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3월 11일 양산에 인접한 부산일신학교에서 학생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양산 중부동에 살고있던 청년 엄주태(嚴柱泰)는 동래고보의거 주동인물의 한 사람인 친척인 엄진영(嚴進永)의 집을 찾아갔으며 마침 동래 읍에서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해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자 이 날 군중시위에 참가하여 학생들이 뿌린 독립선언서, 공약서, 경고문등 각 1매를 가지고 양산으로 돌아와 전병건(全秉建)을 찾아가서 독립선언서 등을 보이며 부산에서 보고 겪은 독립만세시위 사실을 들려주고 양산에서도 즉각 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의하였고, 평소부터 항일민족 정신이 강한 전병건은 그 자리에서 찬동하고 다시 엄주태집에서 만나 독립선언서 5매를 복사하여 중부동에 사는 박삼도(朴三道)와 동면 내송에 사는 이상환(李相煥)을 찾아가 시위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며 거사계획을 세웠다. 그 후로 독립선언서 등을 복사로는 대량작성이 어려움에 따라 정주봉으로 하여금 군청 등사기를 몰래 가져오게 하여 비밀 인쇄하여 3월 27일 양산읍내 장날에 운집한 3,000여 군중에게 이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피체되었다. 동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6월형을 받았으며 동년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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