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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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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립운동가(처본부선정, 우리고장출신)
처본부선정 이달의 독립운동가 곽재기(郭在驥) 충북 청주(淸州) 사람이다. 일찍이 서울에 올라와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다시 귀향하여 청주 청남학교(靑南學校) 교사로 있었으며 1909년 청소년으로 조직한 비밀단체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의 당원이 되어 80여 당원과 더불어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지하공작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동년 7월 황상규(黃尙奎)·윤소룡(尹小龍)·김기득(金奇得) 등과 함께 만주 길림성 동녕현(東寧縣) 소수분(小綏芬)으로 건너가 이성우(李成宇)외 여러 동지와 알게 되면서 동년 11월 9일 김원봉(金元鳳)·이성우(李成宇)·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 등과 일제의 관리·밀정·관공서 등을 주살·파괴함으로써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무력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려는 강력한 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다. 의열단 조직후 제1차 거사계획은 폭탄으로써 일제의 고관을 처단하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 등을 파괴하여 전국의 인심을 자극하기로 결정하고 황상규(黃尙奎)는 먼저 길림(吉林)에서 폭탄의 제조방법을 배우고 그는 김기득(金奇得)과 함께 상해로 가서 폭탄구입에 힘썼으나 자금관계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길림에 돌아왔다. 길림으로 돌아온 후 자금조달에 노력하다가 이성우(李成宇)와 함께 다시 상해로 가서 1920년 3월 폭탄 3개와 이에 필요한 약품을 구입한 다음 동지 조현상(趙賢尙)과 운반방법을 의논하고 임시정부 외무차장 장건상(張建相)에게 의뢰하였다. 장건상은 이것을 우편으로 안동현(安東縣) 세관에 있는 영국인 'S·포인'에게 보내주었다. 그는 즉시 안동으로 와서 소포를 찾은 뒤 그곳에서 황상규(黃尙奎)·윤소룡(尹小龍)과 상의하고 동지인 이낙준(李洛俊)의 손을 거쳐 경남 밀양청년단장 김병환(金 煥)에게 보냈다. 그리고 서울에 잠입하여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보내온 폭탄 13개를 만들만한 탄피·약품·부속품 등과 미국제 권총 2정 및 탄환 100발을 받은 다음 짐짝을 만들어 서울 천보상회(天寶商會)의 손을 거쳐 운동점에서 밀양으로 부쳐 김병환(金 煥)의 집에 감추었다. 동년 6월 서울에서 동지들과 날마다 처소를 바꾸면서 총독부·동양척식회사·경성일보사 등을 폭파하고자 그 정황을 밀탐하던 중 이 사실을 탐지한 경기도경찰부(京畿道警察部)에 동지 6명과 함께 피체되고 경상남도 경찰부로 이송되어 극심한 취조를 받고 1920년 7월 31일 서울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 영도(永島) 예심판사의 손에서 예심이 종결되고 동년 6월 7일 공판이 개정되어 이동(伊東) 재판장이 입에 웃음을 띄우며 사실을 묻자, 그도 역시 웃으며 "재작년 7월 중국 길림성으로 갔는데 갈 때의 목적은 두 가지이니 첫째는 국내에 되도록 많은 폭탄을 수입할 일과 둘째는 해외의 조국독립운동 현황을 시찰하고자 간 것인데 이와같은 취지를 정한 본래의 마음은 재작년 3월 이래로 조국독립운동을 입과 붓으로는 구할대로 구하고 원할대로 원하였으나 피로써 구한 일은 없음으로 그와같은 무기를 사용하여 피로써 구하고자 원하였는데 우리는 군함도 없고 대포도 없으며 폭발탄·육혈포밖에 구할 수 없었다"고 대답하여 독립에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날 검사는 징역 10년을 구형하였고 동년 21일 징역 8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0년 다시 국외로 망명하여 만주·상해·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광복으로 동년 11월 귀국하였다. 귀국후 한국 '에스페란토'어학회를 운영하는 한편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52년 1월 10일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우리고장출신 이달의 독립운동가 유진태(兪鎭泰) 1872. 1. 5 / 1942. 4.27 충북 괴산(槐山) 사람이다. 1897년경 대한제국(大韓帝國) 무관학교(武官學校)에서 수학하였고,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자주 민권 자강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19년 3월 김창숙(金昌淑)을 중심으로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제출할 유림단(儒林團)의 독립청원 장서(長書)가 비밀리에 작성될 때에 평안남북도 지역의 서명자 확보를 책임지면서 적극 참여하였고, 김창숙이 장서를 휴대하고 중국으로 떠날 때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 등 먼저 망명해 있던 인사들에게 소재장을 써 줌과 동시에 장서 및 자금의 안전한 반출 방법에 관해 조언하고 박돈서(朴敦緖)를 동행인으로 소개해 주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나중에 일경의 취조를 받게 되고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어 1921년 6월 26일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의 설립을 주도하여 순회강사와 순회문고 운영 등의 방법에 의한 청소년 계몽을 계획하였고, 동년 12월에 미국의 워싱턴에서 개최될 예정인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제출하고자 이승만 등이 주도하여 동년 9월에 작성된 진정서, 즉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에 조선교육회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2년 3월 23일 이상재와 함께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의 창립을 주도하고 이사(理事)로 선임되어 전국순회 강연회 및 한글강습회 개최 등을 통한 청년계몽과 인재양성 등 장학활동에 주력하였고, 1930년대에는 이사장에 선임되어 1938년 4월 2일 일제의 이른바 신교육령(新敎育令)에 의해 협회가 해산될 때까지 계속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9일 서울에서 20여 개 단체 관계자 30여 명으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 발기준비회가 구성될 때에 10인 준비위원 중의 1인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1923년 3월 30일 서울에서 발기총회를 가진 조선민립대학(朝鮮民立大學) 기성준비회(期成準備會)의 중앙집행위원과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민립대학 설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후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체로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될 때에 그 운영기금으로 1만 원을 희사했다고 전해지는 그는 동년 12월 10일 신간회 경성지회 제2회 정기대회 석상에서 경성지회장에 선임되었다. 1929년 12월 13일 신간회 중앙본부가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보고하고 대대적인 항일시위를 촉발하기 위해 개최코자 한 민중대회(民衆大會) 활동과 관련해서 일경에 검속되어 취조를 당하였다. 1930년 11월 9일 신간회 전체대회를 대신해서 열린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22일 조선일보(朝鮮日報) 제7대 사장에 취임하였고, 동년 5월 10일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에서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처럼 그는 독립운동자 후원 활동, 청년계몽 및 인재의 발굴과 양성을 통한 민족교육운동, 물산장려운동, 신간회운동 등 다방면으로 민족독립운동에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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