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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지(방)청소개

국가보훈부(국문) - 우리청소식(충북북부보훈지청) 상세보기 - 제목, 내용, 파일, URL 정보 제공
2002.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처본부 선정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필주(李弼柱)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1869.12.22 / 1942.5.25 출 생 지 경기 고양 운 동 계 열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경기도 고양(高陽) 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선천적인 무인 기질로서 20세에 한말(韓末) 군대에 입대, 단시일에 승진하여 장교로서 8년간 복무하였다. 1907년(융희 1)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군대생활을 청산하고, 남대문에 있는 상동(尙洞) 예배당의 전덕기(全德基) 목사를 중심으로 한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 가입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주권이 완전 상실되자, 통분하여 일주일간 단식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 후 종로 청년회관(Y.M.C.A.)의 초대 체육교사로 재직하다가 상동 공옥소학교(尙洞攻玉小學校) 체육교사로 취임하여, 애국정신과 광복의 큰 뜻을 청소년에게 가르쳤다. 또 모범적인 기독교 신자로서 미신타파와 신분차별의 배격 등 신생활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후 신학교(神學校)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貞洞敎會)에서 목자생활을 하며 조국독립에 대한 이상을 품고 이상재(李商在)·최병헌(崔炳憲)·최성모(崔聖模)·오화영(吳華英)·신홍식(申洪植)·박동완(朴東完)·오정도(吳貞道)·현 순(玄楯) 등과 자주 만나 친분을 두터이 하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이 거의 구체화되던 1919년 2월 27일 자기의 집에서 이인환(李寅煥)·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泰永)·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오화영·최성모·박동완 등의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함태영이 최 린(崔麟)으로부터 가져온,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초안을 회람하고, 기독교측의 민족대표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 전개에 따른 계획을 검토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 종교활동과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말년에는 수원 남양교회(南陽敎會)를 맡아보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우리고장출신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용호(李龍浩)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1889. 3.11 / 1920. 3.12 출 생 지 충북 음성 운 동 계 열 3.1운동 충청북도 음성(陰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소이면(蘇伊面) 한천(漢川) 장터에서, 김을경(金乙卿)·이중곤(李重坤)·권재학(權在學) 등이 주동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군중들을 이끌고 면사무소까지 행진하여 당시 면장이던 민병식(閔秉植)에게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김을경·이중곤이 연행되자, 시위군중을 이끌고 경찰주재소로 몰려가서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계속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해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태(笞) 90을 확정 받았으나, 혹독한 고문과 모진 태형의 여독으로 바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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