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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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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춘천)해외의병 역사탐방 답사기(7)
부서 보훈과
넷째 날 2006.10.25(수) 아침 흐림. 낮에 가랑비, 저녁은 흐림. 윤희순 여사의 노학당 터를 탐방하다 06:30 모닝콜로 다시 기상. 창밖의 멀리 작업장에서 인부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인다. 하늘은 이름없는 애국선열들의 넋이 서린 환인현을 떠나는 것을 눈치 챘는지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이날은 춘천 출신의 항일 의병장인 외당 유홍석의 며느리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의병장인 윤희순 여사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세운 노학당 터와 1907년 정미의병 당시 큰 활약으로 용맹을 떨친 이진룡 장군의 묘비를 찾기로 한 날이다. 08:10 아침식사 후 보락보로 출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장인 윤희순 여사가 운영하던 노학당터에 도착하였다. 1915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될 때까지 50여명의 항일독립운동가를 양성한 노학당은 온데간데 없고 드넓은 논과 말라가는 옥수수 밭 사이로 비석만 덩그러니 서 있다. 환인현 조선족 역사연구회와 환인현 보락보진 인민정부에서 노학당 창립 90주년을 맞아 2002년 7월 윤희순여사의 항일정신을 널리 홍보하고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노학당유지비(老學堂遺址碑)”라고 한다. 비의 규모는 시멘트 기단위에 화강암 자연석을 가공하여 세운 것으로 무게 3톤, 높이 1,192cm(노학당 창립연대를 상징), 너비 60cm이다. 기단높이는 90cm(노학당 창립 90주년을 기념), 너비는 2.5m이다. 두 산맥 사이에 놓인 강과 들판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고국의 독립을 위해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다. 희망이 없는 때에 희망을 키우기 위해 어린 학동들에게 한글자 한글자를 가르치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 한글자 한글자 배워 고국의 독립의 희망이 되고자 했던 학동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려웠던 시절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애타는 마음을 가누며 한걸음 한걸음 실력을 키워나가고자 했던 스승과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져 하늘을 쳐다보게 되었다. 윤희순과 노학당 윤희순 여사는 해주윤씨 익상의 딸로서 186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6세 때에 고흥 류씨 제원에게 출하가여 한말 의병장 외당 류홍석의 며느리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리자 일제의 침략과 내정간섭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항일 구국운동이 전개 되었다. 윤희순 여사의 시아버지 외당선생은 의병대장이 되어 춘천과 가평일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자 , 여사는 “안사람 의병가”, “병정노래” 등 의병가를 지어 의병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1907년 정미의병때 윤희순 여사는 군자금을 모아 의병을 돕는 한편, 직접 화약과 탄환을 만들거나 군사훈련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병탄되자 1911년 외당선생의 뒤를 따라 모든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들어가 시아버지, 남편등과 함께 구국투쟁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13년 외당선생이 서거하고, 1915년 의암선생마저 서거하였으며, 항일투쟁의 동지인 남편 류제원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윤희순여사는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독립투쟁을 하던 돈상, 민상 두 아들과 자손들에게 희망을 걸고 국권회복을 염원하면서, 동창학교의 분교인 노학당을 건립하고 50여명의 항일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등 죽는 날까지 조국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1935년 76세를 일기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이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1983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노학당 노학당은 윤희순여사가 문화적 지식과 애국정신으로 국권회복을 위하여 목숨바쳐 싸울 수 있는 항일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1912년 환인현 보락보진 남괴마자에 동창학교의 분교로 세웠다. 노학당의 교장은 윤희순, 교원은 동창학교의 이동하, 김영포, 이극로 등이 겸했으며, 학생은 주변의 조선마을에서 모집해 온 조선인 애국청년들이었고, 교재는 국어, 수학, 역사, 지리, 체조, 창가, 작문 등이었다. 학교운영자금은 노학당의 교장인 윤희순과 학생들이 반일투쟁을 지지하는 환인지역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에게서 모금을 받아 운영하였는데, 1915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될때까지 도합 50여명의 항일 인재를 양성하였다. 09:55 노학당에서 청산구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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