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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지(방)청소개

국가보훈부(국문) - 우리청소식(경북남부보훈지청) 상세보기 - 제목, 부서, 내용, 파일, URL 정보 제공
(경주)"8월 이달의 현충시설' :신돌석장군유적지
부서 보훈과
o 탐방장소: 신돌석장군 유적지 (경북 영덕 축산면 도곡2동) o 탐방시기 : 2006.08.06 o 시설상태 : 양호 o 건립자 :신돌석장군비제막추진위원회 o 건립년도 :1999년 11월 o 관리기관 :영덕군 신돌석장군 유적지는 의병장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신돌석장군에 대한 각종 자료들을 모아 전시한 곳으로 기념관, 충의사, 동-서재, 내-외삼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관 안에는 일제의 침략과 의병활동, 영덕지역의 항일운동, 신돌석의 약력과 설화, 태백산전투, 일본군의 무기와 형장구, 그림으로 보는 신돌석 장군의 일생, 신돌석 장군의 전략과 전술 등 장군의 일대기가 기록과 함께 장군의 체온이 묻어나는 장도를 비롯해 유물 18점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은 1999년 11월 장군의 항일정신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세워졌다. < 신돌석 장군에 대해서 > 본명이 신태호이며 호랑이라고도 불리어온 영릉 의병장 장산 신돌석 장군은 1878년 11월 3일 경북 영덕에서 부친 신석주와 모친 분성김씨 사이에 2남 2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항일의식이 남달랐고 애국애족하는 마음이 강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국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무력으로 적과 싸울 것을 결심. 1906년 영해에서 의병 300명을 일으켜 진군을 개시하였다. 1907년 12월 서울 공격을 목적으로 13도의 의병이 연합하기로하고 13도 창의군 교남창의대장으로 천거되어 양주에 모여들었을 때 신돌석은 평민출신이란 이유로 제외되자, 의병을 이끌로 영해로 돌아와 항전을 계속하였다. 일본군은 그를 체포할 목적으로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 현상금을 탐낸 주민이 일본군에 매수되어 그를 집으로 초대, 독주를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살해하였으며, 이때 일기 30세로 순국하셨다. 국가보훈처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추서하였다. o 교통편 : 영덕영해시외버스터미널에서 유적지 가는 시내버스 08:00 ~ 18:20, 1일 8회 운행 ※ 시내버스 터미널 054-732-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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