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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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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첫째주 탐방 -장지연선생기념비(2003.8.4)
부서 지도과 선양계
위암장지연선생기념비 □소재지 : 경북 상주시 동문동 왕산공원 내 □건립기관 : 천주교서문동성당 □건립일자 : 1986.7.17 □시설규모 : 비높이 2m, 폭1.5m □관리기관 : 상주시 □내 용 구한말 대표적인 민족언론인 장지연 선생(1864-1920)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상주군 내동면 동곽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만행이 자행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처에 발송하였다. 1898년 11월의 만민공동회에서는 간부급으로 맹활약하다가 그해 말 독립협회, 만민공동회가 해산당할 때에는 경무청에 일시 체포·투옥되기도 하였다. 1899년에는 『시사총보』의 주필에 취임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광문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간행하였다. 1901년 황성신문사의 사장을 맡아 민중계몽과 독립정신 고취에 진력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해서 국권을 박탈하고 이것이 국민에게 알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당분간 비밀에 부치자,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에 『시일야방성대곡, 이날에 소리내어 크게 울었다』이라는 논설을 써서 이를 폭로하여 일제 헌병대의 사전 검열을 거치지 않고 서울시내에 배포해버렸다. 그의 이 유명한 논설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이등박문의 기만책을 폭로하여 통렬하게 비판하고, 4천년 독립국가와 3천리 강토와 5백년 종사를 다른 나라에 바치며 2천만 동포를 다른 나라의 노예로 만드는데 동의한 을사 5적을 개, 돼지만도 못한 매국노라고 준열히 비판했으며, 장차 노예로 떨어질 위험이 있는 우리 이천만 동포는 죽었으면 모르겠거니와 4천년 국민정신이 살아 있으면 국권회복에 분발하여 일어 설 것을 촉구하였다. 이 논설이 게재된 황성신문의 일부는 당황한 일제 헌병대에 의하여 사후에 압수되었지만 많은 부분이 서울 시내에 배달되어 서울 시민과 전국 국민들의 을사조약 반대투쟁과 국권회복을 촉발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 논설로 말미암아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으며, 『황성신문』은 압수와 정간 처분을 당했다. 그러나 이 논설의 발표후 나라의 상태를 알게된 국민들과 지사들이 연일 상소운동과 시위운동을 전개했으므로 일제는 1906년 1월 24일 65일만에 할 수 없이 그를 석방하고 『황성신문』도 1906년 2월부터 복간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으로 그는 황성신문의 사장과 주필로서 근무할 수 없어서 이를 사임하였다. 1906년 3월 윤효정 등 동지들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본격적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했다. 『대한자강회월보』, 『조양보』를 비롯한 잡지들과 신문에 전국민이 각성하고 분발해서 실력을 배양하여 국권회복 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수많은 애국계몽 논설들을 발표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시작은 그가 중심이 된 대한자강회의 활동에 의거하여 비롯된 것이며, 그는 애국계몽운동의 초기에 대표적 이론가, 지도가로 활약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김광제, 서상돈 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신문과 잡지들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다수의 논설을 발표했다. 1907년 7월에 일제가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법들을 연달아 제정하자, 대한자강회 회원들과 함께 격렬한 반대시위 운동을 전개했으며, 이로 인해 1907년 8월 19일 대한자강회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 당했다. 이에 그 후속단체로 1907년 11월에 권동진, 남궁억 등과 함께 대한협회를 발기하여 조직했다. 1908년 2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노령으로 망명하여 해조신문의 주필로 활약하며 언론인으로 민중계몽과 독립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그후 상해, 남경 등지를 유랑하다가 양자강의 배안에서 일제의 첩자로 보이는 괴한에게 습격당해 부상을 입고 1908년 8월 귀국하였다. 1909년 10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발행되는 경남일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다시 언론 구국운동을 계속하다가 1910년 8월 일제가 나라를 병탄하고 이에 항의하여 선비들이 연이어 자결하자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를 경남일보에 게재하여 일제를 규탄했다. 이로 인해 경남일보가 폐간되고 활동의 무대도 완전히 박탈당했다. 1910년 8월 언론인으로서 활동무대를 완전히 박탈당하자 1911년 이후 향리에 칩거 나라 빼앗긴 울분을 토하다가 1920년 10월 2일 마산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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