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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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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탐방-대구시민만세운동기념비(2003. 2. 24)
부서 지도과 선양계
대구시민만세운동기념비(大邱市民萬歲運動紀念碑)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1동 234-33(망우공원 내) □ 건립기관 : 대구광역시 □ 건립일자 : 1985. 1. 11. □ 시설규모 : 높이 7.2m □ 관리기관 : 대구 망우공원 관리사무소 □ 내용 대구시민들이 전개한 3.1만세운동을 기념하여 만든 기념비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의거가 시작되고 평양과 각지로 번져가자 대구의 뜻있는 인사들도 거사를 다짐하게 되었다.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생 이용상이 독립선언서 200매를 가지고 3월 2일 이만집을 찾아오자 대구의 유지들은 구체적인 의거 계획을 세우고 시위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장소는 서문밖 시장으로 하고 장이 서는 3월 8일 오후 1시로 시각을 잡았다. 백남치.이만집.이상백.정재순 등이 핵심인물이었고 남선정(제일)교회.남산교회,달남(서문)교회가 중심이 되어 신도들과 계성학교, 신명학교의 학생들에게 뜻을 펴 갔다. 1919년 3월 8일 정오 조금 지나서부터 서문시장에 데모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수업을 마친 계성학교 학생들은 평복으로 위장하여 삼삼오오 모여들었고, 신명학교 여학생들도 언덕길에서 내려왔다. 성경학교 학생 20명은 박장호가 인솔해서 도착했다. 군중들은 이만집과 김태련을 나락 가마니를 실은 달구지 위에 올려 세웠다. 김태련이 주머니에서 독립선언서를 꺼내어 크게 낭독하다가 분위기가 급함을 깨닫고 공약 3장만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 시위에 호응한 군중이 수천 명에 달하였다. 시위군중은 일본기마대와 기관총을 앞세운 대구 주둔 80연대의 저지,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동성로까지 진출하였다. 이틀 뒤인 3월 10일에도 남문시장에서 또 한차례의 만세 시위가 있었으나 눈치를 채고 미리 와서 경계하고 있던 일본 헌병들의 저지로 가두시위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주동자들은 곧 검거되었다. 3.1운동의 독립정신은 그 후에도 끊이지 않고 여러 가지 형태의 광복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어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의 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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