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청소식

지(방)청소개

국가보훈부(국문) - 우리청소식(강원서부보훈지청) 상세보기 - 제목, 부서, 내용, 파일, URL 정보 제공
(친절춘천) 해외의병 역사탐방 답사기(4)
부서 보훈과
둘 째 날(Ⅱ) 2006.10.23(월) 평정산 의암선생 기념원을 답사하다. 10:30 청영릉 탐사를 마치고 다시 숙소인 흥경빈관에 도착하여 1시간동안 거리를 구경했다. 되도록 서민들이 사는 골목을 찾아 들어가 보았는데, 연립주택 사이사이에 있는 허름한 단층집들은 우리 시골집보다 형편이 무척 어려워 보였다. 햇볕을 쬐며 노점을 펼친 상인들의 모습이 무척 순박하면서도 일행에게 바가지 씌우기에 여념이 없는 눈치인데 탐사대원들과 흥정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13:23 평정산(平頂山)으로 출발했다. 산길옆의 넓은 밭은 말라버린 옥수수단으로 가득하여 만주 특유의 가을 풍취로 가득하며 양떼가 도로를 가로지르고, 우리가 잘 볼 수 없은 당나귀가 자주 보이는 것이 인상적이다. 우리 시골도 과거엔 저러했을까... 13:41 평정산에 도착했다. 의암선생기념원에서 묵념을 하고 “한말의병해원상생굿”을 하고 제사를 드렸다. 세계의 평화를 바라는 의암선생의 뜻을 받들어 세워진 지구모양의 상징물은 조금 찌그러져 있는데 한번은 바람에 떨어졌고, 한번은 아이들이 놀다가 올라가 흔들어서 떨어졌다 한다. 의암선생의 우주철학과 세계평화 염원을 기념하기 위해 지구모양으로 만든 상징물인데 관리에 소홀한거 같아 아쉬움을 남겼지만 원주민들이 탑의 동판을 떼어다가 팔려 했다는 현지인의 소리에 답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의병장정 중 가장 뜻깊은 시간이기도 했다. 춘천출신의 대 유학자이자 항일 의병장인 유인석 선생과 이름없이 스러져간 항일 애국선열들을 위로하고자 우리의 소리와 몸짓이 어우러진 “한말의병해원상생굿”을 펼치고 제를 올리 등 탐방단이 주최한 작지만 큰 추모제를 가졌기 때문이다. 강원대학교 사학과 학생들의 춘천사회문화연구회 회원들과 무용단원들이 우리 가락에 맞춰 살풀이 춤을 추며 이국땅에서 고달팠던 선열들의 넋을 위로 했는데 탐방단의 일원으로 같이 참가한 의암선생의 증손자 유연창(66세. 고흥유씨 종친회)씨는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안타까왔는데 의병탐방단과 함께 의암선생을 추모하는 의식을 치루어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특히 이 자리에는 신빈현 난천자마을(기념원에서 건너다 보이는 마을)에서 의암선생의 묘소를 지키며 유가족을 도와준 독립운동가 이병엽씨의 손자 이화덕(73. 조선족. 신빈거주)씨와 마을 주민 20여명이 자리를 함께 해 그 의미를 더했다. 의암 선생이시어 ! 항일 선열들이시어 ! 편히 잠드소서.... 의암선생기념원(毅菴先生紀念園) 중국에서의 의암선생의 항일운동을 기념하고 한중 두나라 국민의 전통적 우의 강화와 경제협력의 발전을 확대하기 위하여 2003년 10월 9일 요녕성 신빈현 평성산진 정부와 한국 의암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안형순 강원도민일보 사장)에서 평정산진 서산에 건립하였다. 의암선생 기념원은 부지 1,500m의 넓이로 중앙에 의암선생 기념비가 있다. 비석의 높이는 4m(기단, 비신, 지구본)로 기단의 직경이 7.4m(의암선생의 향년을 의미), 비신의 높이는 1,915cm(의암선생이 서거한 연대를 상징), 비신의 너비는 1,842cm(의암선생의 출생년대를 상징), 지구본의 직경은 1.27m(의암선생의 출생 월·일을 상징), 지구본 아래의 받침판은 두 층인데 각각 20cm(의암선생이 생전에 외국에서 20년동안을 망명하였고, 사후엔 20년간 중국에 안장되어 있었음을 상징)이다. 그리고 지구본은 의암선생이 세계평화를 위하여 일생을 분투했음을 상징한다. 기념비의 뒷면에는 의암선생의 생애와 신빈일대에서의 선생의 항일활동을 간략히 기술하였다. 15:26 버스를 타고 환인(桓仁)으로 출발하였다. 국토는 울퉁불퉁해서 차가 속도를 낼 수 없었고 덜컹덜컹 느릿느릿 달리는 차창밖에는 만주의 산골풍경이 지나갔다. 거위떼가 길을 막고, 송아지가 길을 질러가고, 짐 실은 자전거가 어슬렁 거리며 지나가고 양떼가 길옆에서 풀을 뜯어먹고 오토바이는 겁 없이 차사이로 막 다닌다. 중앙선은 있지만 차선의 개념이 없다. 환인근처 6키로미터 정도에서 멀리 오녀산성이 보인다. 어둠속에서 환인댐의 불빛도 보인다. 17:00 드디어 환인에 도착해서 숙소인 정방빈관(正方賓館)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음식은 여전히 입맛이 아니고 탐방단원들이 가지고 온 고추장, 깻잎, 창란젖, 소주등이 아주 인기품목이다. 18:00 몇몇 탐방단원들은 시내 구경을 가고 나머지 대원은 배정받은 방으로 간다. 아마도 방에 끼리끼리 모여 이국풍경을 담소하고 있으리라. 환인(桓仁) 환인이라는 지명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임금 환인과 같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내려와 자리잡은 곳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환인현은 현재 인구 30만명의 만족 자치현이며, 이곳에는 약 8,000명정도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이 많이 살았던 서간도 지역의 거점도시이며, 1910년대에는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등이 동창학교 선생으로 있으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환인현에는 조선 사람과 만주족이 반반정도였다고 하는데, 해방이 되면서 조선사람들이 귀국하여 이제는 만주족의 땅이 되고 말았다. 환인은 단동,관전, 봉성, 통화, 집안 등과 함께 요동 동부의 산간지대 및 혼강~압록강 유역을 대표하는 지역가운데 하나로서 하안 충적대지와 골짜기가 잘 발달되어 있어 인문이 발달 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 더구나 각 하천을 따라 형성되어있는 충적대지가 환인현 중심부의 환인분지로 집중되어 있어 이곳이 정치 및 문화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환인은 혼강 중류지역을 대표하는 청동기 시대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기원전 37년에는 주몽집단의 주도에 의해 환인분지에 고구려가 건국된 것이다. 우리는 역사책에서 졸본이라 배운 바로 그곳이다
파일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