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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보훈지청

지(방)청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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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4월'의 국가유공자 김덕순 순국선열
부서 보훈계
독립운동가 김 덕순 순국선열(1909.?) 김덕순 선열은 경기도 강화(江華) 출신 의병으로 강화도(江華島) 일대에서 군자금 수합 활동을 하면서 부일배(附日輩)와 일본인들을 처단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를 절감하게 하였다. 국권강탈 행위인 을사늑약은 일제가 그간 은폐해 왔던 한국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언론활동·종교활동·교육활동·학술활동 등을 통한 국민 계몽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이었다. 특히 의병운동은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같은 시기인 1908년 6월경 김덕순은 의병운동에 투신하여 김용기(金龍基)·지홍일(池洪一)·박계석(朴啓石)·조인선(趙仁善)·고부성(高夫成) 등 수십 명의 동료 의병과 함께 총기로 무장하고 강화도 일대에서 군자금 수합 활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그는 교동(喬桐) 송가도(松家島), 강화도 석모도(席毛島)·말도(末島)·망도(望島), 산이포(山伊浦), 풍덕(豊德)군 영정동(領井洞), 개성군 금릉포(金陵浦)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또 같은 해 7월 강화도 말도 해안에 정박한 기선(汽船)을 습격하여 군자금과 군수품을 탈취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강화도 석포(石浦)에서 이들의 의병활동을 밀고한 부일배 송대현(宋大鉉)과 양학진(梁學辰)을 처단하고, 또 인천 서쪽 해상에서 일본 어선을 공격하여 일본인 선원 1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피체되어 1909년 3월 23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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