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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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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춘천) 해외의병 역사탐방 답사기 (6)
부서 보훈과
셋째 날(Ⅱ) 2006.10.24(화) 만주벌판 사첨자에서 애국선열들의 혼을 만나다. 13:15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첨자(沙尖子, 의암선생이 서거하신 곳)로 출발하였다. 버스는 고개를 넘어 강원도 산길같은 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산속도로에서 청소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는데 전체적인 느낌이 강원도의 철원 같기도 했고 태백이나 정선지역 같은 느낌도 받고는 했다. 14:00 사첨자에 도착하였다. 혼강(渾江)건너편에 관전현 보달원 고령지촌이 보였다. 예전에는 “방취구”라고 불렀던 곳인데 의암학회의 연구부장이자 지도교수인 강원대학교의 엄찬호 교수가 또한 상세한 설명으로 탐방단원들의 궁금증을 해소하였다. 이곳은 만주로 망명한 의암선생이 1915년 74세로 병사하기까지 약 1년간 머문 곳으로 “관전현만주족자치현”에서 1994년 의암기비를 세웠다고 한다. 강건너로 가는 배편을 구할 수 없어서 의암선생이 말년에 기거하시고 서거하신 땅을 직접 밟아 볼 수는 없었지만, 전체적인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넓고 해 잘드는 좋은 땅들 중 선생은 동쪽을 향한 좁은 골짜기 땅을 조금 얻어 기거하셨던 것 같다. 강건너를 보고 있으려니 선생의 외로움과 울분, 고국을 향한 그리움이 느껴져 남몰래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 눈앞의 강이 혼강이라 했던가.. 세월은 강물처럼 무심히 흘러왔지만 , 골짜기 소나무에 서린 선생의 의기(義氣)와 진노(震怒)는 탐방대원들의 개개인의 가슴에 도장처럼 찍혀 버렸다. 14:30 이심전심이었을까? 누가먼저랄 것도 없이 탐사대원들은 고개를 넘어 강줄기를 따라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마을에는 예전에 의암선생이 이곳에 기거하는 것을 도왔다는 중국인의 후손이 경영한다는 양조장이 있다고 했다. 만주에서의 시골길을 걷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강에서 빨래하는 아낙네의 뒷모습, 오리떼가 강물에 떠서 놀고 있는 모습, 강을 가로질러 놓은 출렁다리, 논에서 늦은 타작을 서두르는 농부들, 돼지우리에서 꿀꿀대는 작은 돼지들, 당나귀, 이런 풍경은 이젠 우리나라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은데 무엇보다 좋은 것은 도로에 차가 없어 마음껏 활보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자유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고 이 길은 의암선생도 여러번 셀 수 없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이리라. 이렇게 걸어서 북녘을 관통해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자유롭게 남북을 왕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머너먼 이국 이곳에서 의암선생이 꿈꾸었던 미래의 한국은 어떤 것이었을까?.. 다시 의암 선생이 살아계시다면 그분은 고국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어떤 일을 할까...? 지금 우리의 모습은 그분이 보시기에 어떻할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의암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을 우리 탐사대원들은 걸었다. 의암 유인석의 만주에서의 근거지 방취동 의암 유인석은 1842년 1월 27일 강원도 춘천 남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8세에 소학을 읽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하며 14세부터 화서 이항로에게 글을 배웠고, 화서가 사망한 뒤에는 김평묵과 유중교를 스승으로 모시며 위정척사 운동에 참가하였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리자 의거할 마음을 굳혔으며, 제천의병이 조직되고 문인인 이필희, 서상렬, 이춘영 등이 의암을 찾아가 의병대장의 소임을 맡아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자 의병장이 되어 전국 의병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의병운동이 성과를 나타내지 못하자 선생은 국내 의병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요동으로 떠났다. 1869년 7월 의암은 압록강을 도강하기에 앞서 재격백관이라는 장문의 격문(공경대부와 선비와 백성들에게 자신의 당당함과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켰음을 밝힌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의암이 240여명의 제천의병들과 함께 요동으로 간 것은 청병(淸兵)을 하고자 함이었으나 혼강의 사첨자(방취동)에 이르러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한 환인현장 서본우에 의해 강제로 무장해제를 당하였으며 유인석 선생과 원용정, 유홍석 등 21명만이 심양으로 향하였을 뿐 나머지 219명은 강제로 해산 귀국당했다. . 이곳은 또한 유인석 선생의 말년 거주지로서 선생은 1914년 8월에 관전현 방취구에 정착하여 1915년 정월 29일 순국하였다. 관전현 정부에서는 1994년 5월 의암선생이 이곳에 은거했다는 사실을 기려 기념비를 설립했는데 큰 자연석을 기단으로 삼아 가로 90cm, 세로 70cm의 비석에 100여자의 글을 새겨 유인석의 행적을 기렸다. 사첨자는 개발이 되지 않은 조그마한 시골마을이며 사첨자진은 혼강을 따라 언덕위에 이루어진 마을로 240호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데 소들이 방목되어 평화로이 풀을 뜯고 있는 골짜기로 멀리 혼강이 내려다 보이는 명당자리라고 할 수 있다 15:00 의암선생의 독립운동을 후원한 중국인 고 손홍영씨가 운영하던 하전자 마을의 덕태흥양조장은 고인이된 손씨의 손자가 사장을 맡아 여전히 대를 잇고 있어 감회를 새롭게 했다. 양조장에 일하던 직원들은 때아니게 몰려간 80여명의 한국사람을 구경하느라 넋을 잃었고 탐방대원들은 양조장에서 일하는 중국의 서민들을 구경했다. 작은 시골 양조장에서 서로가 서로를 구경하는 풍경이 벌어져 이채로왔다. 탐방단원들은 양조장에서 직접 제조한 술을 대량 구입하여 의암 선생이 진 빚을 100여년 만에 갚는 감격(?)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는데, 이웃나라간에 너무나 무심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북녘의 우리 동포들은 어떻할까.. 미래에 그들과는 어떤 대화를 하고 어떤 인사로 만남을 가져야 할지... 같은 민족인데 서로가 서로를 구경하는 그런 모습이 상상되자 가슴이 아파왔다. 만주에 사는 조선족 후세들도 또한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한다. 중국정부에서 정책적으로 한국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고 하는데 말을 잊으면 결국 문화를 잃고, 민족으로서의 소속감을 잃게 되니 참 안타까운 마음이다. 18:00 숙소인 정방빈관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었다. 19:00 습재연구소 허준구 소장의 “의암·습재 요동시 선별 모음”강의가 있었다. 의암선생과 춘천 의병장인 습재선생이 서로 화답한 시를 몇편 강독했는데, 선생들의 구도자적인 모습, 동지애, 애국심, 애민심을 직접 눈으로 보는 듯 햇다. 고달픈 민중들을 위해 힘을내어 외나무다리를 놓아 주자는 굳은 결의를 보고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본보기를 배웠으리라. 김구선생조차 존경해 마지 않았던 의암선생의 대의는 습재라는 동지가 있었기에 더욱 빛을 발하지 않았을까. 진정한 도의(道義)를 함께한 동지애는 고국의 미래를 밝히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 시대의 대도는 무엇인가. 정신을 잃고 물질에 지배당하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 다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 천산 만산 산마다 붉은 단풍 노란 잎/ 바람은 불고 부는데 밤은 왜이리 기나긴가/ 얼어 죽지 아니하고 그대를 만나리니/ 가지마다 잎마다 봄기운은 오르리라 - 의암 유인석 허준구(43) 습재연구소장은 두분이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일제에 굴복하거나 항일투쟁을 그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졌음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하며 습재 이소응(1852~1930)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인 1929년 동짓날 조국의 광복을 확신하며 지은 시로 연결했다. □ 앞의 양(양)이 다한 곳에 다시 양이 생겨나고/ 대도(대도)는 쉼 없이 항상 이어져 갈 뿐이다/ 차고 나면 떠나가고 한창인 것이 들어옴은/ 천지조화를 꿰 뚫어 보는 이치이다/ - 습재 이소응 21:00 취침. 일부 탐사대원은 환인시내를 구경한다고 외출했다. 가이드는 얼마전 이곳에서 관광객의 장기를 적출하고 살해하는 사건이 난 곳이라고 말했다. 각별히 조심해야 할 곳인 것 같다. 각자가 소지한 여권은 이곳에선 우리돈으로 1천3백만원에 거래된다고 한다. 중국인들에게는 탐나는 물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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