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청소식

지(방)청소개

국가보훈부(국문) - 우리청소식(강원서부보훈지청) 상세보기 - 제목, 부서, 내용, 파일, URL 정보 제공
(친절춘천) 해외의병 유적탐방 답사기(9)
부서 보훈과
다섯째 날 2006.10.26(목) 압록강 철교와 심양 고궁을 탐방 06: 30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모닝콜로 기상을 하고 창밖을 보니 멀리 압록강 철교가 보인다. 아래로는 단동 기차역 광장에서 모택동 동상이 오른손을 들고 분주히 오가는 중국 인민들에게 아침인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동상의 크기가 놀랍다. 아마도 5층이 높이의 아파트보다 더 높아 보이는데 한국에서는 이만한 크기의 동상을 본적이 없다. 모택동이 펼친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은 처음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단동의 택시 기본요금이 5원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는데 이는 나중에 택시를 타보자 사실로 확인이 되었다. 08:35 아침식사후 단동의 압록강 단교(斷橋)로 갔다. 숙소에서는 버스로 5분거리. 압록강은 강폭이 워낙 넓어서 우리 한강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압록강을 넘어 많은 애국지사들이 만주로 망명하였고, 수많은 동포들이 먹고 살기 위해 이 강을 건넜다고 생각하니 애처럽고 자랑스러운 마음 그지없다. 압록강 위에는 철교의 동강난 모습과 현재의 철교가 마주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이 이 철교를 지나며 왜놈 순사들 앞에서 얼마나 가슴 졸이었는가. 고향을 떠나며 망명하는 선열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고, 6.25 당시에 폭격으로 동강난 철교를 바라보며 민족의 비극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통일이 되면 이 철교를 지나 단동, 심양을 거쳐 북경으로, 다시 내몽고를 거쳐 러시아로, 유럽으로 또는 심양에서 장춘, 하얼빈을 거쳐 러시아의 치타로 가서 러시아와 유럽으로 갈 수 있으리라. 압록강변에서 배를 타고 신의주방면으로 가까이 갔다. 가래와 담가로 작업을 하는 북한 주민들이 가까이에서 보였다. 김정일 장군이 어쩌고 하는 요란스럽지만 빛바랜 페인트의 선전 문구들, 폐선처럼 강변에 매어져 있는 어선들, 총을 메고 다니는 북한 군인들도 눈에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대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와 하며 탐사대의 한 학생은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북쪽의 어린아이들이 배고파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울다 지친 멍한 눈을 들어 창밖만 바라다 보는 아이들의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울다 지친 아이의 엄마와, 그런 자식과 아내를 남겨두고 주린 배를 안고 밖에 나와 삽질을 하며 담가를 들고 흙을 나르는 남편의 마음은 어떠할까. 무엇을 위하고 누구를 위한 이념인가. 실제로 그들의 요란한 선전문구가 너무나도 무색하게 일하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엔 명백히 어떤 의욕도 희망도 없어 보인다. 배는 10m정도를 남기고 더 가까이 가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너무 가까이 가면 한국 관광객들이 담배와 돈을 던져주고 그 답례로 북한 군인들이 돌을 던지기 때문이라 한다. 아무튼 위험한 일이다. 단동시는 최근 현대적 시설들이 늘어나면서 요녕성 지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급격한 발전을 이루어 가고 있는 반면 압록강 건너편의 북한 신의주는 아직 어둠의 땅으로 남아 있다. 북한으로 가는 길이 끊긴 압록강 단교는 중국인들에게는 운 좋은 관광 수입원이지만 그 다리에 선 우리 탐방대원들에게는 뼈아픈 과거와 현재를 동감하게 할 뿐이었다. 09:30 심양으로 출발 중국의 고속로로를 달리고 달렸다. 특이한 점은 중국의 고속도로는 휴게소가 없다. 몇칠동안 버스를 탔더니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다들 잠자는 모습. 다시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사방에 낮은 산조차 하나 없는 곳이 버스로 한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누군가 등산을 좋아 하는 사람은 이곳에 살 수 없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난 등산을 좋아 하시는 춘천의 김대일 지청장님이 생각났다. 13:30 심양의 톨게이트에 도착했다. 식당 매력주방(魅力廚房)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심양은 일제의 조선침략 및 만주점령으로 대한독립투사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항일운동의 요람이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가난과 일제의 학정을 피해 많은 조선족 사람들이 심양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살고 있다. 심양(沈陽) 심양은 2,000여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고도이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천하를 36개 군으로 나누었는데 심양은 요동군에 속하였다. 서한시기에 와서야 심양은 성시의 윤곽을 가지기 시작하였으며 후성이라 불렸다. 당나라때에 와서는 심주라 개칭되었으며 원나라때에 와서는 심양이라 불리게 되었다. 1625년부터 1644년까지 청조의 도읍이었으나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봉천이라 불렸으며 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중국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이후 다시 심양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조선시대 인조 14년(1636)에 발생한 병자호란으로 청나라는 조선을 굴복시키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잡아서 심양 고궁주변의 조선관이란 곳에 기거토록 하였으며, 당시 척화론을 부르짖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3학사를 처형하였으니 우리 민족과는 별로 반갑지 않은 인연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현재 심양은 상해, 북경, 천진 다음으로 가는 도시이고 중국 최대의 중공업 도시로서 전기, 기계, 금속, 군사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시구 면적은 261km, 인구 700여만명이 살고 있으며 주요 관광지로는 고궁, 신락유적지 등이 있고 항일 유적으로는 봉천역, 서탑교회, 만주사변 기념비 등이 있다. 14:40 심양의 고궁을 관람. 심양 고궁(古宮) 청조의 초대황제인 누르하치와 2대황제인 태종이 왕조의 기초를 다지면서 건축한 황성으로 1625년부터 1636년까지 11년에 걸쳐서 완공되었다. 북경의 자금성에 이어 2번째로 큰 고궁이며 6만㎡의 부지에 70여채의 건물과 300여개의 방이 조성되어 있다. 시내 동부의 선양로에 접한 곳에 입구가 있는데 내부는 동, 중, 서로로 크게 나뉘고 출구는 남쪽에 있다. 심양 고궁의 궁전에는 왼쪽에 만문이 오른쪽에 한문이 있어 북경의 고궁과는 반대로 되어 있다. 동로에는 고궁을 대표하는 대정전이 있는데, 황제와 신하들이 정무를 보던 곳이다. 중로에는 숭정전, 봉황루, 청령궁 등의 주요 궁전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숭전전은 2층 팔각형이 특징이며 특별한 의식이 있거나 알현할때에 이용되던 곳이고, 봉황루는 연회가 있을때에 사용되었다. 서로에는 황제의 도서관이나 무대가 있고, 후세에 건륭제가 증축한 문소각(문소각)이 있다. 이곳에는 사고전서(사고전서)가 소장되어 있다. 16:07 한금소고(韓金燒烤)에서 저녁식사. 18:53 북한이 운영한다는 칠보산(七寶山)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19:20 칠보산 호텔의 4층 회의실에 탐사대원들이 모두 모여 답사 소감 발표회를 열었다. 이대근 춘천문화원장은 “독립운동”이란 표현은 일제가 우리의 “독립전쟁”을 비하하기 위해 만든 말이므로 앞으로는 독립전쟁이란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우리 민족혼이 죽은 채로 독립전쟁을 했거나 독립전쟁을 준비하지 않았으면 이미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되어 있을 것이므로 선열들의 피에 감사하고 보답하며 그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할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하였다. 소감 발표회에 이어 이번 탐방의 설문조사가 진행되었다. 설문조사 후에는 심양에서도 가장 번화하다는 서탑(서탑)거리를 탐방하였다. 한국의 번화한 이태원거리가 연상되었는데 특이한 점은 걸인이 많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업고 구걸하는 아빠, 6세정도의 어린 아들에게 손짓으로 구걸을 지시하는 젊은 엄마, 아이는 신발이 없어 비닐봉지를 신고 있다. 늙고 헐벗은 할아버지도 종이컵을 들고 구걸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전후 모습이 저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파일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