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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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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산남의진 관련 자료소개(daum기사)
부서 보훈과
"산남의진 창의100주년 기념학술회"가 12월 13일 영천 청소년수련관 2층 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 안병원 회장은“뜻 깊은 해를 맞이해 오직 국권회복을 위한 일념으로 영천ㆍ영일ㆍ청송 등을 비롯한 경상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한 산남의진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이를 재조명하기 위해 행사를 마련했다”면서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당부했다. “나라의 형세가 이렇게 되고 민족존망이 이에 있거늘 내가 앉아서 나라의 망함을 보고만 있겠는가?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보답하기로 하고 오늘 황제로부터 중대한 임무를 받았으니 너는 곧 고향으로 돌아가 집안을 보살피도록 하라.” “임금께서 신하에게 내리신 명령과 어버이가 자식에게 분부하는 것이 같사오니 나라를 구한 후에 사가를 보존하는 것이 도리에 마땅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젊은 자식이 할 일이오니 바라옵건대 소자에게 대임을 맡겨 주시오면 소자 힘을 다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해 집을 보존하겠습니다.”1905년 일본이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자 고종황제는 정환직을 불러 짐망(朕望)이라는 밀지를 내려 화천의 물을 부탁한다고 했다. ‘화천의 물’이란 옛날 중국의 궁성에서 적국의 침범을 받자 유능한 신하가 왕과 옷을 바꾸어 입고 목이 마르니 화천의 물을 떠오라며 왕을 피신시킨 후 대신 처형당했던 고사를 빗대어 친일파 관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고종황제의 재치였다. 집으로 돌아온 정환직이 아들에게 고종의 밀지를 보이며 집안을 돌볼 것을 명하고 대의를 행하고자 했으나 아들이 3일 동안 간청하여 결국 정용기가 먼저 산남의진을 이끌게 되었다. 조선 철종 5년(1844)에 태어난 정환직은 의술을 배우다가 고종 24년(1887)에 북부도사가 되고 1894년에 동학란이 일어나자 사남참오령이 되어 황해도의 동학군 토벌에 참가했으며 1899년 종묘화재 때 신주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왕으로부터 패물을 하사받았다. 이듬해 삼남도관찰사로 부임해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1905년 을미조약이 체결되자 흥해, 청하 등지에서 아들 용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대장을 맡았던 정용기가 청하, 청송에서 적과 대항하여 입암으로 진격하다 전사하자 정환직은 패병들을 재정비해 흥해, 신해 등지에서 많은 적을 격파하였으나 1907년 청하에서 적에게 붙들렸다. 적은 여러 가지로 회유책을 썼으나 오히려 크게 꾸짖고‘몸은 죽어도 마음은 변치 않으리, 의가 중하니 죽음이 오히려 가볍도다. 뒷일을 누구에게 맡길꼬, 깊은 밤 오경을 말없이 앉아 세우도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1907년 조양각 앞 천변에서 총살당했다. 충효재(경상북도 기념물 제81호)는 구한말 산남의진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정환직(1844∼1907)ㆍ정용기(1862∼1905) 부자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생존 의사들이 검단동을 충효동으로 고쳐 1923년에 건립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꾸몄고 주위는 난간을 돌려 지었다. 정원에는 유허비와 화천지수(華川之水)비가 있으며 대문 앞에는 충효동 사적비가 서있다. 조양공원 문화원 앞에 세워진 산남의진비는 그들의 공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의 후원을 받아 지난 1963년 3월에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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